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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황성의 적(跡)’(황성옛터)은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이 송도 만월대를 산책하다 비감에 젖어 만든 노래다. 보름달 휘영청 뜬 한밤중에 폐허가 된 궁궐터를 돌아보다 떠돌이 악극단원 신세인 자신들의 처지와 겹치면서 단숨에 만든 노래였다. 이애리수는 이 노래 한 곡으로 민족 별내지구 아파트 의 애환을 노래한 절창(絶唱)이 됐다.
1932년 빅터레코드 본사 초청으로 일본에 갔을 당시 강석연(왼쪽)과 촬영한 사진. /이동순 교수 제공
◇한 달 만에 5만장 팔려
개성 출신 이애리수(1910 부산소상공인진흥원 ~2009)는 순회극단 조선연극사 배우였다. 연극 공연 막간에 노래를 불러 여흥을 주는 순서가 있었는데, 노래 실력 뛰어난 이애리수가 곧 이 극단을 대표하는 막간 가수가 됐다. 이애리수는 1930년 ‘오동나무’ ‘강남 제비’ 등 음반 7종을 낸 것을 시작으로 빅터,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잇달아 음반을 출시했다.
1932년 봄 빅터 레코드에서 대학생대출한도 나온 음반 ‘황성 옛터’가 제대로 떴다. 한 달 만에 5만장이 팔렸다. 1934년까지 유행가, 영화극, 신민요, 연극주제가, 난센스 등 음반 50여종을 냈다.
1933년 이애리수 커플의 음독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3년 1월13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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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연극사 ‘샛별’
이애리수는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1920년대 후반 대중극단인 조선연극사 ‘샛별’로 소개됐다. ‘나는 나는 별 중에 단단하고 빛 고운 별/천년만년 햇빛을 보려고/잠자지 않는 별이랍니다.’
1930년 1월1일 조선일보 신년호에 이애리수 인터뷰가 실렸다. 기자는 이애리수를 적금 추천 ‘잠자지 않는 별’에 빗댔다. 이애리수는 자기에게 적격인 배역으로 ‘카추샤’(‘부활’ 여주인공)를 꼽았고, ‘초코-레트’를 좋아한다고 했다. 스포츠를 할 줄 모르지만, 스포츠 구경은 좋아한다고 답했다. 이상형 배우자로는 ‘바이올리니스트’를 꼽았다. (이상 아홉살에 첫 무대, ‘카추샤가 適役’의 이애리수, 조선일보 1930년 1월1일)
극단 '조선연극사' 스타 배우 이애리수를 소개한 조선일보 1930년1월1일자 신년호. 톨스토이 소설 '부활' 여주인공 '카추샤'가 가장 어울린다고 했다. 초콜릿과 스포츠 경기 구경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정사소동 벌인 이애리수 커플
이애리수는 1933년 벽두부터 사회면 사건기사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다. ‘조선의 化形배우 애리수 情死 소동’ ‘상대의 남자는 모 전문학생’ ‘帝大의원에 입원 가료’
‘첫봄의 일기가 안온한 금 9일 첫 새벽 오전 3시50분경 부내 봉익동 65번지에 거주하는 조선 유행가의 유망한 가수화형여배우 이애리수(22)는 그의 애인인 돈의동 13번지 배상호의 장남 연희전문 상과 2년생 배동필과 다량의 ‘칼모친’을 먹은 후 한 많은 세상을 등지고 정사하려 하였으나 그래도 서로 미덥지 않은지 서로 서로의 팔에 동맥까지 끊고 다량의 피를 흘린 후 부둥켜안고 고민하는 것을 가인이 발견하고.’ (조선일보 1933년1월10일)
‘칼모친’은 일본 다케다 제약이 시판한 수면제로 당시 널리 사용됐다. 인기 가수와 명문학교 생과의 스캔들도 떠들썩할 법한데 정사(情死)까지 시도했으니 말 그대로 충격적인 뉴스였다. 본처가 있는 유부남이란 사실이 문제였다.
◇소동 끝에 결합
‘완쾌는 무리’라던 애초 예상과 달리 이애리수, 배동필은 빨리 회복했다. (情男과 歌姬, 조선일보 1933년1월11일) 신문들은 후속보도를 이어갔다. 목숨을 건 ‘투쟁’덕분인지 결합을 반대하던 양가 가족도 두 손 들고 항복했다.
‘그들은 열정에 타오르는 충심의 보수였던지 지금은 양쪽 부모의 이해도 성립되었으므로 앞으로 며칠 남지 않은 퇴원 날을 기다려서 원하고 바라던 ‘스위트홈’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사선을 넘어서 결혼! 냉엄하던 부모도 쾌락, 조선일보 1933년 1월13일) 배동필은 같은 기사에서 ‘관대한 부모의 양해를 얻게 되었으므로 원하는 결합은 다시 될 것 같습니다. 학생의 몸으로 세상을 소란케 하여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애리수는 이후 가정주부로 살았다. 2년 뒤 다시 음독 소동(인기의 유행가수이던 이애리수가 또 음독, 조선일보 1935년5월21일)을 일으킨 걸 보면 파란은 있었지만 그 후 평범한 여생을 보낸 듯하다. 1939년 옛 스타들의 근황을 전하는 기사에 이렇게 등장한다. ‘끝끝내 사랑에 성공해서 지금은 얌전한 어머니로서 효성스런 며느리로서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무대는 돌아간다 여배우 부침기, 조선일보 1939년6월8일) 이애리수 부부는 슬하에 2남 7녀를 뒀다.
◇70여년 만에 돌아온 이애리수
반세기 넘게 잊혔던 이애리수가 2008년 느닷없이 대중의 눈앞에 돌아왔다. 경기도 일산의 노인병원에 입원한 채였다. 인기 절정 때인 스무살 무렵의 가냘픈 얼굴과 환자복 차림의 쪼그라든 얼굴이 비교되면서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했다.
이애리수는 이듬해 3월31일 99세로 타계했다. 조선일보는 ‘황성 옛터의 가수 이애리수 별세’(2009년4월2일) 기사를 내보냈다. 부음 기사 한 줄 못 남긴 강석연보다는 나은 처지라고나 할까.
◇참고자료
이동순, 한국 근대 가수 열전, 소명, 2022
박찬호 지음, 안동림 옮김, 한국가요사 1895~1945, 현암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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