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스위스’로 불리며 중국 슈퍼리치들 자금 피난처 역할을 하던 싱가포르에서 중국인 부호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올 들어 중국 정부가 해외 자산 감시를 강화하자 부를 과시하면 수사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이들은 중국 당국 검증을 피해 최고급 스포츠카 대신 중국산 전기차를 타고, 고가 와인을 마시는 대신 비밀 창고에 숨기기 시작했다.
로이터는 4일(현지시각)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중국 본토 출신 부유층이 최근 당국 감시 강화로 소비를 급격히 줄이고 있다고 전했다.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해안가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연합뉴스


변화는 한 대에 최소 수억원을 호가하는 초고가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싱가포르에서 벤틀리나 롤스로이스는 차량 모델과 상관없이 타고 다니기만 해도 차값 두세 배에 달하는 세금을 추가로 내야 한다. 싱가포르 정부는 지난해 고가 차량에 대한 세금 사아다쿨 체계를 개편하면서 시장가격(OMV) 8만 싱가포르 달러(약 9000만 원)를 초과하는 차량에 부과하는 추가 등록비(ARF) 요율을 기존 220%에서 320%로 대폭 인상했다. 10억 원짜리 롤스로이스를 사려면 세금만 32억 원을 더 내야 한다.
고액 세금에도 불티나게 팔리던 벤틀리와 롤스로이스 판매량은 올 들어 곤두박질쳤다. 싱가포르 육 바다이야기합법 상교통청(LTA)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싱가포르 내 벤틀리 판매량은 19대에 그쳤다. 2021년 103대가 팔려나갔던 것과 비교하면 80% 이상 급감했다. 차량 평균가격이 벤틀리보다 비싼 롤스로이스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2023년 한 해 95대가 등록됐지만, 올해는 같은 기간 13대가 팔렸다. 판매 부진 정도가 아니라 시장 붕괴 수준이다.
바다이야기사이트 반면 중국 전기차 브랜드 BYD 판매량은 급증했다. BYD는 2023년 싱가포르에서 1416대를 파는 데 그쳤다. 그러나 올해는 10월까지 7473대가 팔렸다. BYD는 올해 판매량이 430% 폭증하며 전통적 강자였던 도요타까지 제쳤다. 어느덧 전기차뿐 아니라 내연기관차까지 합친 싱가포르 전체 자동차 시장 1위 브랜드로 등극했다.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씰(Seal)과 같은 BYD 고성능 모델은 싱가포르 현지에서 차량취득권리증(COE)을 포함해 약 20만~25만 싱가포르 달러(약 2억 3000만~2억 8000만 원) 선에 팔린다. 추가 등록비와 차량취득권리증을 포함한 벤틀리 가격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이라 부를 과시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대신 ‘친환경 트렌드에 동참한다’는 명분과 사치 풍조를 단속하는 중국 단속 감시망을 따돌리기 좋은 선택지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싱가포르 현지 딜러들은 로이터에 “중국 큰 손들이 이제 도로 위에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로우 프로파일(low profile·드러내지 않는 소박한 태도)’ 모델을 원한다”고 전했다.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상징하는 보닛 위 '환희의 여신' 로고. /연합뉴스


부동산 시장에서도 중국인 부호들은 실종됐다. 싱가포르 정부는 자금 출처가 불분명한 해외 자금 유입을 막고, 부동산 과열을 잡기 위해 외국인 주택 구매에 대한 취득세(ABSD)를 기존 30%에서 60%로 두 배 인상하는 초강수를 뒀다. 집값 절반 이상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여파로 올해 외국인 럭셔리 콘도 구매 건수는 전년 대비 98% 폭락했다. 현지 부동산 통계에 따르면 전체 부동산 거래 중 외국인 비중은 2023년 초 약 4.7%에서 올해 1.8% 수준으로 급락했다. 중국 부호들이 몰려사는 곳으로 유명했던 센토사 지역 골프 클럽 외국인 회원권 가격은 2023년 95만 싱가포르 달러(약 11억 원)에서 올해 66만 싱가포르 달러(약 7억 4000만 원)로 30% 이상 떨어졌다.
부동산 업계는 돈이 있어도 깨끗한 돈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골프 클럽 회원권조차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뀌었다고 하소연했다. 고액 자산가 자산 관리를 전담하는 패밀리 오피스(Family Office) 설립 신청 건수는 중국 본토 부호를 중심으로 50% 이상 감소했다. 로이터는 싱가포르 골프 회원권 중개업체를 인용해 “클럽들이 중국인 매수자 자금 출처 조사를 이전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세밀하게 진행하고 있다”며 “자금 출처를 제대로 소명하지 못해 거래가 중단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중심지 리앙 세아 스트리트의 중국인 상점가. /연합뉴스


과시와 수집에 몰두하던 예술품과 와인 시장도 은닉(隱匿)에 집중하고 있다. 올해 예술품 시장에서 싱가포르가 수입한 예술품 총액은 작년보다 74%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예술품 수입액이 급증한 이유가 ‘활발한 거래’보다 ‘안전한 자산 보관’에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인 부호들이 자산을 숨기려는 목적으로 예술품을 대거 사들이면서 일시적으로 수입액이 뛰었다는 뜻이다.
과거 정관계 요인들 선물이나 과시용으로 애용했던 고가 와인 수요도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구매와 보관 방식이 달라졌다. 싱가포르 중국 부호들 사이에서는 희귀 와인을 구매해 자택이 아닌 면세 구역 내 개인 창고에 보관하는 방식이 떠오르고 있다.
공항 인근 사설 면세 수장고는 최첨단 보안 시설과 세관 검사 없이도 귀중품을 보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 은둔형 자산가들을 끌어들인다. 싱가포르 와인 경매업체 애커 와인 존 카폰 회장은 “중국 수집가들 관심은 여전하지만, 그 방식이 은밀해졌다”며 “최근 싱가포르 정부가 주도한 대규모 자금세탁 수사 과정에서 수천 병에 달하는 와인과 위스키가 압수 목록에 포함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택에 거대한 와인 셀러를 두는 행위 자체가 범죄 수익 은닉 혐의가 될 수 있다는 공포가 퍼진 탓”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중국 베이징 슈퍼마켓에서 한 소비자가 중국 흑룡강산 대두를 사고 있다. /연합뉴스


중국 당국은 올해 ‘공동부유(共同富裕·다 같이 잘살자)’ 기조 아래 해외소득·자산에 대한 세무조사와 감시를 부쩍 강화하고 있다. 중국 본토 내수 경기가 침체하는 가운데, 해외 거주 중국인 부호들이 호화롭게 생활하는 모습이 중국 내부 여론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달 “중국 지방 세무당국들이 빅데이터를 이용해 해외소득을 신고하지 않은 개인을 추적하고, 수백만 위안에 달하는 추징·가산세를 부과했다”고 전했다. 특히 소득 수준이 높은 선전·베이징·샤먼·광둥·푸젠·쓰촨 등 주요 경제 중심지에서 공통적으로 해외소득 누락자 점검·경고를 하고 있다.
돈 자랑에 대한 싱가포르 정부 입장 또한 단호하다. 리셴룽 선임장관은 지난 10월 한 대담에서 “싱가포르는 부유한 외국인을 환영한다”면서도 “2만 달러짜리 샴페인을 터뜨리거나, 페라리를 몰고 한밤중에 질주하며 ‘내가 여기 왔다’고 알리는 과시는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현지 매체들은 ‘싱가포르가 어떤 돈이든 환영(Any wealth is welcome)하던 시대에서 깨끗한 돈만 환영(Clean wealth only)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분석했다. 자산 관리 기업 WRISE 그룹 케빈 텡 최고경영자(CEO)는 “중국 부호들이 더 신중하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됐다”면서 “과거처럼 무분별하게 돈을 뿌리는 투자는 싱가포르에서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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