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12월 17일, 폐허가 된 국민정부 수도 난징에 입성 하는 일본 화중방면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
1948년 4월 16일, 극동전범군사법정의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방청석도 빈자리가 없었다. 이날의 관심은 수석 검찰관 조셉 케난의 마지막 심문을 기다리는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였다. 마쓰이의 외형은 피고석에 자리한 군인출신 동료 도조 히데키, 도이하라 겐지, 이다가키 세이시로 같은 국제급 인물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평생 명문대학 연구실을 떠나본 적 없는 왜소한 학자 같은 모습이 주목을 끌었다. '난징(南京) 대학살'을 기획하고 지휘
사이다쿨바다이야기게임 했다고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였다.
케난의 송곳같은 심문이 시작됐다. 당시 마쓰이는 폐병 말기였다. 작은 목소리에 반벙어리 같은 어눌한 어투였지만 답변 내용은 독 묻은 바늘과 진배없었다. 중국측 검찰관들의 심장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나는 일본과 중국의 분쟁은 아시아라는 대 가정 내부에서 발생한 장남과 동생의 다툼에 불과하다고 확신한다.
야마토연타 일본은 무력 동원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동생을 사랑하고 보호하려다 보니 말 안 듣는 동생의 무지를 어쩔 수 없이 징계했을 뿐이다." 물벼락 맞은 듯 법정이 정적에 휩싸였다. 기자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쓰기를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 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천만 명이 사망한 침략전쟁의 주역 중 한 사람이, 그것도 30만 명의 무고한 생명을 도살한 피
야마토릴게임 의 제전(祭典)을 동생에 대한 애호(愛護)라 표현하자 멍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케난은 분노를 감추기 힘들었다. 안경 벗고 두 손만 비벼댔다. 진정이 되자 호흡 가다듬고 마쓰이를 노려봤다. 현장을 취재하던 상하이 션바오(申報) 기자가 본사에 보낸 기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마쓰이를 향한 케난의 눈은 사람의 눈이 아
게임릴사이트 니었다. 눈빛이 수술 준비 마친 의사가 들고 있는 예리한 메스를 연상케 했다."
1948년 12월 4일 극동전범군사법정에서 재판장의 교수형 선고 이유를 듣는 마쓰이 이와네.
자리에서 일어난 케난의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발길이 마쓰이가 앉아 있는 증인석을 향했다. 마쓰이에게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피고인 마쓰이 이와네에게 묻겠다. 방금 피고는 중국과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무지한 동생에 대한 형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상대적이라야 한다. 형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 어땠는지 말해라." 대동아성전(大東亞聖戰)과 범아시아주의(泛亞細亞主義)를 정조준한 이 한마디에 마쓰이는 무너졌다. 응시하는 케난의 눈길 피하며 만취한 사람의 웅얼거림 같은 답변이 고작이었다. "동생은 형의 사랑을 재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형의 사랑에 조금도 고마워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싸우자고 덤벼들었다." 법정에 폭소가 터졌다. 마쓰이의 안색이 돼지 간처럼 변했다며 조롱과 조소가 이어졌다.
12월 3일, 교수형을 선고받은 전 대만(臺灣)군 사령관과 천황의 칙명으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을 역임한 1급전범 마쓰이는 23일 0시, 전 수상 도조 히데키, 만주의 로렌스 도이하라 겐지와 함께 스가모 형무소의 교수대에 섰다. 황궁 향해 '덴노헤이까 반자이' 세 번 외친 후 인간 세상을 뒤로했다.
얘기는 3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3년 늦은 봄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허술한 저택에 젊은 일본인이 나타났다. "국부 쑨원(孫文)선생을 만나고 싶다." 쑨을 만나자 자신을 소개했다. "새로 부임한 일본 영사관 육군 무관 마쓰이 이와네, 참모본부의 명을 받들어 선생께 인사 올린다." 쑨은 육군사관학교를 2등으로 졸업하고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마친 초엘리트 장교를 환대했다.
마쓰이는 어린 시절부터 중국 고전을 끼고 살았다. 사관학교 재학 중 러·일전쟁 참전과 프랑스 유학시절 체험한 견문 덕에 국제 사정에 밝았다. 쑨과 온종일 얘기해도 막힘이 없었다. 만남이 빈번해지자 군사적인 조언도 했다. "중국 혁명이 성공하려면 외부의 강력한 지지와 지원을 받아야 한다. 해줄 나라는 일본제국이 유일하다." 쑨이 일본에서 조직한 혁명단체 동맹회(同盟)의 핵심 천치메이(陳其美)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천이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일본 사관학교 재학생 장제스(蔣介石)와는 더 친했다. 하숙집 구해주고 친 동생 이상으로 챙겨줬다.
마쓰이와 장제스를 연결해준 천치메이.
쑨원과의 만남을 계기로 중국의 혁명 엘리트들도 마쓰이에게 마음을 열었다. 유창한 중국어와 중국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활용해 군벌, 정객, 혁명가들과 접촉하며 다량의 정보를 쉽게 손에 넣었다. 내지 깊은 곳의 측량과 지도 제작도 미쓰이는 가능했다.
군 계급이 높아지면서 마쓰이의 배포도 커졌다. 일본이 주도하는 중국의 철저한 개조를 꿈꾸기 시작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역설한 '범아시아주의'는 겉치레였다. 원래 계획은 따로 있었다. 중국의 현대화 실현을 지원해 서구 열강의 압제에서 탈피시킨 후 일본이 영도하는 동아시아의 신질서 구축이 최종 목표였다. 문제는 중국이었다. 너무 유치하고 아무리 설명해도 무슨 말인지 소화 시킬 능력이 부족했다. 참모본부에 보낸 비밀 보고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일본이 엄한 장남 역할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강제로 끌거나 뒤에서 밀어야 한다. 필요시엔 징계도 피할 수 없다."
1933년 10월 육군대장으로 승진한 마쓰이는 2년 후 8월 예비역에 편입됐다. 실의에 빠진 대전략가는 2년간 중국을 떠돌았다. 무리를 했던지 폐가 손상됐다. 1938년 7월 귀국 후 후지산 인근의 호반에서 요양 중 육군대신의 전보를 받고 도쿄로 왔다. 8월 15일 오전 황궁에서 천황을 독대했다. 37세의 인간신(神)은 마쓰이의 폐병을 우려했다. 회복 여부를 물은 후 본론에 들어갔다. "최근 중국 수도 난징의 대문 상하이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우선 2개 사단을 파견 하기로 결정했다. 상하이에 주차(駐箚) 중인 해군 제3함대와 함께 항구와 우리 국민의 재산을 보위해라. 마쓰이가 지휘한 상하이 파견군 30만은 3개월에 걸친 전투에서 중국군 70만을 격퇴한 후 난징으로 진군했다.
1938년 12월 중순 마쓰이는 징계와 대학살이 동의어라는 것을 난징에서 입증했다. 4개월 전 8월 15일 황궁으로 향하는 길이 11년 후 교수대로 향하는 첫걸음이었다는 자각을 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