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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지환어 (25-05-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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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10대는 애정결핍과 결탁한 안하무인의 시절이었다. 불조심 포스터대회에서 입상한 경력으로 우쭐대던 초등학교 시절, 알량한 소묘 솜씨를 뽐내겠다며 사립 명문 예술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을 쳤다. 교내 미술대회에서 상을 싹쓸이한 아이의 허풍은 참으로 당돌했다. 조물주는 이 허풍을 더 보고 싶었을까. 아니면 면접 선생님의 최대 실수였을까. 덜컥 붙었다. 합격 후 교복을 맞추러 찾아간, 서울 종로구에 있던 뉴서울양복점을 잊을 수 없다. 소매를 가봉하는 내내 동화 속 소공자가 된 느낌이었다. 교복인 감색 양복에 광이 나는 구두를 단정하게 착용한 거울 속 내 모습이 멋져 보여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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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신감이 충만하던 내게도 못 하는 게 있었다. 바로 넥타이 매기. 넥타이를 직접 맬 줄 몰라 아버지가 매준 모양을 그대로 놔뒀다가 그대로 매고 학교에 갔다. 1년 가까이 그렇게 했다. 등굣길엔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구두는 늘 번쩍거렸고 교복이 슈트처럼 멋졌기 때문이다. 겨울엔 코트까지 갖춰 입었다. 중학생 sk저축은행 으로선 폼 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입학하고 1년이 지난 뒤부터 기가 죽었다. 감히 말도 못 붙일 정도로 수려한 여학생, 공부 잘하는 남학생이 수두룩했다. 치명타는 1학년을 마친 뒤 받은 학적 기록부다. 나에 대한 선생님의 소견은 한마디로 절망적이었다.
"극히 소심하고 내성적임. 학구열이 없으며 사교성 없음. 학습의 기초가 요구됨. 복장은 도치 불량함. 단 예술 분야에 특별한 관심이 기대됨."
심하게 다친 내 마음과 달리 나를 둘러싼 학교 주변은 아름다웠다. 정말 신의 세계와 통할 것 같은 작은 천사의 교정, 사시사철 팔각정이 보이는 어린이대공원, 지천에 깔린 장미 넝쿨…. 학교는 기풍 있고 화사했지만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던 나의 10대는 그리스신화 속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장애인창업대출 아주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방법을 의미하는 관용어)'를 잃은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가사 실습 시간에 고로케,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것을 좋아했지만 나는 도무지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염산을 이용한 개구리 실험에도, 양철로 만든 쓰레받기에도 도통 흥미가 없었다.?
그렇게 주눅 든 생활을 견디던 어느 날 집 안에 다락 24시간즉시대출 방이 생겼다. 그 뒤부터 나는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의 사상에 빠져 이렇게 혼자 있다가 죽어도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에 골몰해선지 우연한 기회에 나간 교내 백일장에서 상까지 받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국어 선생님은 내게 문학적 용기를 줬지만 덕분에 얻은 자신감이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사춘기의 열병을 앓으며 비틀스와 올리비아 뉴턴 존, 존 트라 볼타, 존 덴버를 흠모할 무렵, 미대 졸업 예정인 23세의 교생 선생님이 나타났다. 그녀가 착용한 레이스가 달린 하얀 원피스가 눈길을 끌었다,?
"초희라고 합니다. 만나게 돼 반가워요! 멋진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게 돼서 너무 기뻐요. 있는 시간 동안 즐겁고 유익하게 지내요."
그녀의 목소리는 희망이었다. 2시간 넘는 힘겨운 통학과 끊임없는 엄마의 잔소리, 용돈을 다 갖다 바쳐도 끝내 보여주지 않던 형의 성인잡지로부터 영원한 해방을 선사할 것만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괜스레 누군가 그리워지던 때 찾아온 여신이었다. 소묘 실력이 뛰어났고 말투는 상냥하고 다감했다.?
"선생님! 남자 있어요? 선생님! 남자하고 뽀뽀한 적 있어요?"
우리들이 짓궂은 질문을 퍼부을 때면 그녀는 창가에 기대어 홍조 띤 볼을 감추곤 했다. 그녀는 언제나 탐미적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이성'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침묵으로 일관했다. 날이 갈수록 내 10대는 호기심과 방황으로 얼룩졌다. 그즈음 초희 선생님의 집에 갈 일이 생겼다. 선생님의 생일이 지난 뒤 생일 파티에 참석하지 못한 우리 반 친구들을 위해 다시 자리를 만든 것이다. 나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푹푹 찌는 한여름. 후줄근한 양복에 빨간 장미를 사 들고 선생님의 집을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선생님은 반갑게 맞았다. 잘 정돈된 나무들, 물고기가 노니는 정원은 내가 이제껏 볼 수 없던 평화스러운 장면이었다. 거실 책장엔 국무총리를 비롯해 여러 대단한 사람에게서 받은 상패, 상장, 트로피, 메달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었다. 선생님의 부친이 받은 것들이었다. 대단하긴 했지만 그런 것들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다. 선생님과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선생님, 사랑하는 사람이 있나요? 정말 묻고 싶었어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일순간 당황한 듯 선생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 없어, 선생님은…, 음… 아직 공부할 게 많아."
선생님은 말끝을 흐렸다. 나는 다시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열 살 정도 나이 차가 나는 남자가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사귈 의향이 있으세요?"
선생님은 잠깐 비가 오는 창밖을 응시하더니 결심한 듯 내게 말했다.
"사랑한다면 전혀 문제없을 것 같아. 그게 내 생각이야."
나는 그때를 놓칠 수 없었다.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목젖 부위에서 꼴깍하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사랑하는데 제 마음을 받아주시겠어요?"
내 말에 선생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곁엔 선생님의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선생님의 어머니는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이내 내 눈을 바라보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초희야, 학생 옷이 많이 젖었구나, 다리미 갖고 와서 좀 다려줘라."
"네, 어머니. 어머! 옷이 다 젖었네.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선생님은 다리미판을 가져와 비에 젖은 내 옷을 말끔하게 다려줬다. 다 다렸을 즈음 선생님은 내게 차분히 말했다.
"선생님이 네게 말할 게 있는데 끝까지 들어줄래?"
"네에, 선생님."
내 눈은 선생님의 입술에 고정돼 있었다.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용기 있게 말한 건 높이 사겠는데… 어쨌든 좋아. 지금부터 20년 동안 선생님을 보다가 그때 가서도 선생님이 좋다면 너의 마음을 받아줄 용의가 있어. 어때? 해볼 만하지 않아? 선생님은 네 마음을 20년 동안 지켜보겠다는 거야."
선생님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의 어머니도 내 눈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저 그럴 수 있어요. 당연하죠."
나는 주저 없이 선생님과 약속했다. 새끼손가락을 고리처럼 걸었다. 그제야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선생님은 2층으로 올라가 사진이며 작품 등을 보여줬다. 정말 꿈만 같았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선생님과 손가락을 건 손을 씻지도 않고 잤다. 그러나 미륵불 같을 줄 알았던 마음은 1년도 유지되지 않았다. 선생님 집을 다녀온 뒤 나는 열심히 교내 활동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다 여학생 몇 명을 만났다. 그러고 그중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다. 졸업할 때까지 그 여학생에게 마음을 보이지 않았다.?
교생 실습은 끝났고, 선생님은 우리들의 수많은 팬레터와 선물을 가슴 가득 안은 채 해맑은 얼굴로 교정을 떠나갔다. 그때 숨죽이며 울음을 삼킨 남학생들도 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선생님이 우리 집에 전화를 몇 번 했는지, 아니면 내가 선생님께 전화를 몇 번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 사춘기를 앓던 내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는 것만은 잊히지 않는다. 20년 후를 기약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지나온 과거는 촌스럽지만 소중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이성과 만나고, 이별하고, 또다시 사랑하다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 선생님이 내게 베풀어준 무한 리필의 배려는 어떤 연애 감정보다 특별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선생님은 지금 어디 계실까. 결혼해 잘 살고 계실까. 20년 동안 기다릴 수 있겠느냐며 새침하게 미소 짓던 선생님의 얼굴과 그날의 설명하기 힘든 감정.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가난한 사춘기 소년의 열병을 감싸준 아련한 추억이 그립다.?
연세영● 1966년 서울 출생● 1994년 중앙대 예술대학 회화과 졸업● 1995년 '시와사회' 등단● 2021년 제9회 직지소설문학상 대상● 저서: 장편소설 '다산 정약용 차왕' '직지의 부활' '의열단쌍권총 김상옥' '오! 북관' 외
연세영 피아니스트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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