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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지환어 (25-10-1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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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중순이 되자 작약이 꽃 망울을 터뜨렸다.
검은 산의 실루엣 속으로 승용차 한 대가 굽이쳐 간다. 두 줄기 주광색 빛은 가로등 아래만 빼꼼한 마을 안길을 돌아 농막이 놓인 어느 밭 입구에 선다. 밤 10시가 되려면 좀 남은 시간인데 불을 밝힌 집도, 돌아다니는 주민도 없다. 엔진을 끄고 차 문을 열자 서늘한 밤공기를 타고 요란한 함성이 밀려온다. “꽈드득 꽈드득, 개골개굴개굴.” 모내기하려 물을 채운 논에서 개구리들이 목청을 높인다. 짝짓기철을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숫 아파트부동산담보대출 개구리의 세레나데는 간절하다.
도시에서 시골로 ‘5도2촌’ 모드 전환
아내와 나는 짐 푸는 것도 미룬 채 텃밭과 정원으로 달려간다. 아직 꺼지지 않은 전조등에 의지해 그곳의 식물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고 싶어서이다. “어머, 작약이 피기 시작했네”, “마늘쫑이 올라왔구먼”, “장미꽃 몽우리가 알사탕만 해졌어요”. 우리는 모기지증권 서로에게 소리쳐 기쁨을 전한다. 그즈음 마당 한켠에서 길고양이 ‘나비’가 “어디 갔다 이제 오냥~~” 하는 뉘앙스로 집사를 나무라며 다가온다. 100미터는 족히 떨어진 데서 우리가 온 기미를 용케 알아채는 노인회장님댁 보더콜리 ‘랙스’도 왕왕 짖는다. “아, 이제 왔구나.” 영화관 암막을 살그머니 걷고 스크린의 세계로 들어가듯, 도시에서 보낸 주중과는 다 원리금균등상환이란 른 양식(모드)의 생활로 발 딛는 순간이다.
2020년 농막을 들여놓고 나와 아내는 금요일 밤이면 밭이 있는 충남 공주로 내려왔다. 그렇게 이틀간 농사를 짓고 일요일 저녁에 올라왔다. 겨울엔 농사일이 없었지만, 시골의 한적함이 좋아 별일이 없으면 왔다. 1년 52주 가운데 40주 정도는 내려온 것 같다. 귀농, 귀촌은 장래의 일이었고, 도 1분자동대출 시와 농촌을 오가는 ‘5도2촌’ 이 우선은 우리의 선택이었다.
600평 텃밭에서 흘리는 땀은 행복의 원천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수도권에서 매주 내려가기엔 거리가 꽤 됐다. 전에 살던 경기도 고양시나 지금 사는 서울 동작구에서 막히지 않는 때를 택해도 2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주중에 회사일 하고 주말 이틀에 몰아 새마을금고 대체휴일 서 하는 농사일은 만만치 않았다. ‘농업인’의 요건을 갖추어 산 밭이 2000㎡(약 600평)나 돼 텃밭이라 하기엔 넓었다. 제초제나 화학비료를 덜 쓰려다 보니 몸으로 메워야 할 일이 많았다. 모기, 나방, 말벌, 뱀을 견디는 것도 배워야 했다. 그렇게 일을 하고 출근한 월요일은 종일 노곤해서 커피를 여러 잔 마셔야 했다.
그런데도 주말이 다가오면 마음이 부풀었다. 교사인 아내도 금요일 아침이면 목소리에 활기가 돌았다. 무엇이 우리 부부를 주말마다 130㎞나 떨어진 텃밭으로 부른 걸까? 그건 시골의 시간이 도시와 다르게 흐르기 때문일 거다. 흙과 함께 하는 게 시골이다. 흙에서 일하고, 곡식과 꽃나무를 기르는 경험은 낯섦, 호기심, 충만함을 준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뒤의 변화를 ‘땅의 예찬’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정원에서 일하게 된 뒤로 나는 전에 몰랐던, 강하게 몸으로 느끼는 특이한 느낌을 지니게 되었다. 땅의 느낌이라고 할 만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쩌면 땅이란 오늘날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행복과 동의어인지 모른다 (…)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로 세계의 디지털화라는 행진을 하면서 땅을 떠났다. 생명을 살리고 행복하게 하는 땅의 힘을 우리는 더는 느끼지 못한다. 그 힘은 모니터 크기로 줄어들고 만다.”
이런 점에서 생활에도 모드 전환이란 게 있다면 5도2촌은 도시 모드에서 시골 모드로의 주기적인 전환이다. 도시가 디지털이라면 시골은 아날로그이다. 도시가 직선의 효율이라면, 시골은 부정형의 조화로움 같은 것이다.
시골에서 아내와 나는 육체노동으로 땀을 흘린다. 할 일은 늘 있다. 유실수를 심고 남은 자락에 마늘, 양파, 감자, 콩을 돌아가며 파종한다. 고추, 상추, 오이, 토마토, 호박, 참외 같은 잎채소나 열매채소도 조금씩 골고루 심는 터라 계속 손이 간다. 농사철인 5월부터 10월까지는 새벽에 장화를 신으면 석양 무렵에야 목수건을 풀어 몸을 털 수 있다. 손과 발을 놀리는 동안 머릿속은 단순해지고, 도시에 두고 온 회사 일은 잊게 된다. 시원한 지하수로 몸을 씻고 저녁을 먹고 나면, 졸음이 쏟아져 초저녁에 불을 끄게 된다. 그리고 새 소리 요란한 새벽까지 곤한 잠을 잔다.
시골에서 아내와 나는 정원을 가꾼다. 농막 주변에는 장미, 작약, 수선화, 향달맞이, 꽃잔디, 접시꽃, 채송화, 꽃양귀비, 백합 등 십수 종의 꽃들이 자라고 반송, 남천, 철쭉, 해당화 같은 교목들도 자리 잡고 있다. 작물도 그렇지만 정원의 꽃과 나무가 시기에 따라 변하는 모습은 거듭 기쁨을 준다. 정원 일은 주로 아내가 하지만 정원에 대한 관심은 나도 뒤지지 않는다. ‘정원의 가치를 아는 곳이 선진국’이라는 게 내 주장이다. 햇살 좋고 선선한 날 우리는 정원에 탁자를 놓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책을 가져와 천천히 읽거나, 볼륨을 조금 높여 음악을 듣는 것도 정원에서 보내는 즐거움이다.
오이가 타고 오르도록 그물망을 설치하고 있다.
쑥 인절미·누룩 막걸리·반딧불이…“나는 자연인”
시골에서 아내와 나는 ‘무한도전’을 한다. 도시에서는 생각 못 한 일을 해 본다. 앞으로의 글에서 소개할지도 모를 사례를 열거하자면 이렇다. 봄이며 지천인 쑥 뜯어 인절미 해 먹기, 누룩 넣고 막걸리 담가보기, 직접 재배한 매실로 우메보시(일본식 매실 절임) 담기, 재료를 주문해 칼슘 비료 및 유황성분의 천연 농약 만들기, 참나무 토막에 종균을 심어 표고버섯 키우기, 비가 세차게 때리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김치전(+막걸리) 부치기, 구멍 낸 항아리에 숯불 넣고 바비큐 하기, 달 없는 날 별자리 찾아보기, 해진 뒤 후미진 덤불로 반딧불이 보러 가기, 마을 앞 수로에서 재첩 조개 잡기, 쌍안경으로 냇가에서 날아오르는 두루미 관찰하기 등. 주변 탐방도 다니는데, 햇살이 좋은 겨울날에는 백제고도 공주에서 ‘하루 걷기’를 하거나 부여 왕릉을 보러 가기도 한다. 가끔 주말에 서울집에 있어 보면 아이들이 독립해 나간 부부가 뭘 같이하며 시간을 보낼지 아이디어가 궁했는데, 시골에서는 그런 걱정이 없다.
우리는 모드 전환이 종종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캠핑 인구가 늘고, ‘나는 자연인이다’, ‘건축탐구 집’, ‘세계 테마 기행’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꾸준히 인기 있는 건 우리 마음속의 어떤 갈망에 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과 접하고, 직접 뭔가를 만들어 보고, 호젓하게 자신과 마주하고자 하는 갈망 말이다.
금요일 밤에 도착한 농막. 10시가 안됐는데 동네는 온통 깜깜하다.
농막은 놀이와 공간이 있는 나의 슈필리움
여수 바닷가로 거처를 옮긴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주체적 공간’ 이 필요하다며 이를 ‘슈필라움’(Spielraum) 이라 소개한다. 독일어 놀이(Spiel)와 공간(Raum)의 합성어인 슈필라움은 물리적인 공간뿐 아니라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말인데, 자기만의 슈필라움이 있어야 우리는 인간으로서 자존감과 매력을 만들고 삶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한다.
지난 5년간 주말을 보낸 농막과 텃밭이 슈필라움인 지는 모르겠으나, 앞서 나온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을 즐겨보던 중년의 나와 아내는 그 이유 모를 갈망을 5도2촌의 모드 전환으로 채우는 중이다.
# 이봉현의 농막일기는?
기자로 35년간 서울에서 일했습니다. 혼자 집중할 때 에너지를 얻는 편이어서, 텃밭과 정원이 있는 호젓한 공간을 꿈꿔왔습니다. 마침내 충남 공주의 산간마을 밭을 사 2018년 사과대추, 자두 등 유실수를 심었습니다, 2020년 봄부터는 농막을 들여놓고 금요일 밤에 내려가 주말 텃밭 농사를 짓고 옵니다. 5년간의 ‘5도2촌’ 생활에서 경험한 기쁨, 시행착오, 지역의 현실 등을 담아 격주로 독자를 만나려 합니다. 한겨레 로그인 콘텐츠 ‘오늘의 스페셜’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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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현의 농막일기
https://www.hani.co.kr/arti/SERIES/3317
글·사진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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