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사를 둘러싼 해석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돼 왔으나 연구는 아직도 미흡하다. 일제가 1940년대 들어 조선어 신문들을 폐간하고 출판 활동을 탄압하면서 조선인의 시각이 담긴 당대의 사료가 매우 부족한 것이 한 원인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전개와 종전, 미군정과 정부 수립 등을 더 깊이 연구하지 않고는 역사적 상황에 대해 추상적이거나 편향된 해석을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재미 학자 문유미 스탠퍼드대 교수가 ‘제대로 쓰는 해방 전후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해방 직후 38선은 분단의 경
황금성릴게임사이트 계선으로 변해갔다. 1947년 10월 38선을 넘어오는 북한 일가족이 미군 병사와 마주하고 있다. 팻말 왼쪽에는 영어로 ‘미국 점령지, 북위 38도, 남한’ 오른쪽에는 러시아어로 ‘러시아 점령지, 북위 38도, 북한’이라고 적혀 있다. /조선일보DB
해방 후 남한의 역사는 소련 군정 하에 이뤄진 ‘
뽀빠이릴게임 북한 혁명’의 실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 시기에 수많은 이북 사람이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월남민’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다. 대체 그들은 누구였으며 왜 고향을 떠났는가?
수정주의 학설의 영향을 받은 연구자들은 소련 군정하의 북한 체제가 민족주의적이고 개혁적인 조치를 취한 반면,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지배 아래 친일
검증완료릴게임 파가 되살아나고 식민지적 억압 기구가 부활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6·25전쟁 전 38선을 넘은 월남민의 실상과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시기의 월남민을 크게 세 부류로 구분한다.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이른바 ‘민주 개혁’에 반대한 사람들과 친일파, 일제 강점기 총동원 정책에 따라 북한이
오리지널바다이야기 나 만주로 이주했다가 해방 후 귀환한 사람들, 마지막으로 해방 이전부터 유학이나 직장 등의 이유로 남쪽에 거주하던 사람들이었다. 최근 10여 년간 월남민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지만, 이 사전적 견해는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다.
◇해방 후 월남민 100만여 명
인구학자 권태환 교수는 1944년과 1949년 인구 조사와
검증완료릴게임 귀환자 관련 정부 통계를 분석해 6·25 이전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인구를 약 74만명으로 추산했다. 이 기간 약 260만명이 남한으로 유입됐는데, 일본·만주 등 해외에서 돌아온 귀환자 180만명을 제외하고, 출생률 등의 변수를 감안한 수치다. 그리고 통계에 잡히지 않은 실제 월남민은 이보다 많았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1947년 5월 38선을 넘어 개성에 도착한 월남민들의 난민 텐트촌 생활상이 담긴 영상. 소독과 예방 접종을 하는 모습./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군은 남한에 진주한 후 약 500만명 규모의 난민과 귀환자를 관리할 기구를 만들고 주요 항구와 38선 접경 지역에서 남한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국적과 출발지를 토대로 일본·만주·북한 등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구분해 월별·연도별 통계를 산출했다. 그 기록에 따르면 1948년 말까지 북한 지역에서 넘어온 사람은 65만5678명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내부 문서에서 많은 사람이 경계 초소를 피해 38선을 넘고 있기 때문에 “통계는 실제의 절반에 불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여러 신문이 1948년 9월 기준으로 140만명이 월남했다고 보도하며, 안재홍을 수반으로 한 남조선 과도정부(1947년 2월 5일~1948년 8월 15일)를 출처로 인용하기도 했다.
종합하면 권 교수의 74만명이라는 월남민 숫자는 미군 기록을 고려할 때 최소치에 가깝다. 만주에서 귀환한 이들과 해방 전부터 남쪽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월남민에게 식량 배급 및 등록 업무를 담당했던 과도정부의 140만명이라는 숫자가 월남민 실체를 더 뒷받침한다. 만일 이 숫자에 만주 귀환자 31만7327명(1948년 말 미군 기록)이 포함됐다고 해도, 적어도 100만명이 넘는 이북 주민이 6·25 전쟁 전 남한으로 넘어온 셈이다.
1950년 1~6월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월남한 가족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문서. 전쟁 중 미군이 점령지에서 노획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누가 넘어왔나: 평남 안주군의 기록
6·25 전쟁 중 미군이 점령 지역에서 노획한 문서 가운데, 평안남도 안주군 정치보위부가 작성한 ‘일반 부문 투쟁 대상자 명부’(사진)가 있다. 보위부가 1950년 1~6월에 체제 위협 대상자를 조사하고 감시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토지 몰수 지주, 선거 반대 투표자 등과 함께 “삼팔 이남 도주자 가족”이라는 항목이 있다. 두 명의 월북민도 별도 항목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한 명은 고향인 안주로 돌아온 38세의 상인이고 다른 한 명은 39세의 사무원으로 이남에서 서북청년단 소속이었다는 메모가 붙어 있다.
월남민 가족으로 총 49명의 이름과 함께 이들의 성별, 계급, 해방 전후의 직업, 소속 정당 및 종교 등이 상세히 기재됐다. 49명 중 해방 전 계급(토지개혁 이전)이 지주는 3명, 부농 5명, 중농 16명, 빈농 2명, 상인 7명이고 그 외는 기록이 분명치 않다. 노동당원이 10명, 조선민주당 11명, 청우당(천도교) 2명이고, 기독교인 8명이었다. 중농과 상인이 다수를 이루고 노동당원도 2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47년 5월 38선을 넘어 개성에 도착한 월남민들의 난민 텐트촌 생활상이 담긴 영상. 기차를 타고 개성역에 도착하는 월남민들./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이 기록은 월남민이 단지 북한 혁명에 반대하는 적대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소련 군정하의 현실과 삶에 불만을 가진 상당수 중간 계층까지 포괄했음을 보여준다.
◇미군정 기록의 월남민과 북한 혁명
미군정 정보부는 한국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검열했고 정치 상황을 발췌해 내부적으로 회람했다. 함경도에서 서울로 온 공산주의자가 공산당 당수 박헌영에게 보낸 편지도 있었다. 대중 선전이 목적이 아닌 서신에서 이 공산주의자는 “이북에서 당의 정책이 너무 억압적이어서 많은 사람이 남쪽으로 떠나고 있으며, 일부 경찰이 언론과 행동의 자유를 침해하고 돈을 받는 데 골몰해 여론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반대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
미군정은 1947년 5월에서 12월까지 월남민들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대규모 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소련 군정의 실태를 의심하다 월남 동기 등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목적이었다. 월남민과 북한 체제에 대한 연구를 발표해 온 김재웅 박사가 조선통계연보를 분석한 논문이 있는데, 포함된 수치가 유사한 것을 보면 이 연보는 군정의 조사 보고서에 기반을 둔 것 같다. 조사 대상이 된 월남민은 총 10만3628명이었고, 직업군으로 사회적 성격을 분류했다.
그래픽=김현국
이 조사 결과는 월남민이 광범위한 사회 계층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농업 종사자는 13.5%에 불과했는데, 안주군 사례에 비춰 보면 지주뿐만 아니라 중농층이 다수 포함됐을 것이다. 놀랍게도 공장 노동자와 광부를 합친 노동자 계층도 16.7%에 달했다. 무직과 실업자가 42%를 넘은 것은 가족 단위의 월남으로 여성과 아동이 포함됐기 때문이라고 하나, 동시에 북한 경제의 난맥상을 보여준다.
1947년 하반기의 월남민들은 1946년 봄 이후 단행된 토지 개혁과 노동 법령 등을 직접 경험한 후에 38선을 넘었고, 따라서 단순히 고향을 찾아 돌아온 사람들로 간주할 수 없다. 김재웅 박사가 1948년부터 1949년 사이 강원도 인제군의 북조선 노동당 조직에서 출당 처리된 월남민들의 출신 성분을 분석한 자료가 있는데, 총 284명 중 빈농이 219명, 중농이 55명이었다. 즉 빈농과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당에 가입할 정도의 핵심 지지층도 체제를 이탈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해방 직후 북한의 노동절 행사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함께 걸려 있다./조선일보 DB
◇월남민, 단순 이탈 아닌 생존 위한 결단
가족을 이끌고 38선을 넘는 행위는 상당한 위험을 수반했다. 그럼에도 전쟁 전에 약 100만명에 육박하는 이북 주민이 고향을 등졌다. 이산의 대열은 지주와 친일파만이 아니라 노동자, 상인, 사무직, 기술자, 실업자를 아우르는 다양한 사회 계층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해방 직후 조선 사회가 좌익 계열 인민위원회 주도하에 자발적 사회 혁명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수정주의적 해석과 충돌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수많은 이북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은 사실을 감안할 때, 수정주의적 해석은 당대 조선인들의 경험과 지향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가? 어쩌면 그것은 식민지를 겪은 조선의 역사적 현실보다 농민 혁명을 설명하는 서구 이론에 기대어 구성한 세련된 가설에 가까운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