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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반전의 세계사’] 반서구 저항으로서 친일 민족주의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이 인천 팔미도 앞바다에서 러시아의 소형 군함 ‘카레예츠호’를 어뢰로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영국 주간지 ‘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04년 4월 2일 자에 실린 러일전쟁 화보.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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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5월 27일 예상을 뒤엎고 일본 연합함대가 러시아 함대를 쓰시마 해협에서 격파하자 세계는 전율했다. 인도 총독 커즌 경은 일본의 승전고가 “동양의 수군거리는 군중들 사이로 천둥소리처럼 퍼져 나갔다”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세계가 목격한 가장 엄청난 현상”이라며 일본의 승리에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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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민족주의의 상징 간디와 네루는 다른 맥락에서 전율했다. 이들은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승리가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인도와 아시아의 자유를 되찾는 신호탄이라고 확신했다.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벵골의 자기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주위를 흥겹게 돌며 일본의 승전을 축하했다. 인도국민회의가 청년 학생들을 도쿄로GIANT현대차그룹 주식
보내 일본을 배우도록 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터키의 국부 케말 아타튀르크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오스만 제국을 근대화한다는 프로젝트의 정당성을 재확인했다. 터키와 인도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새로 태어난 적지 않은 남자애들에게 ‘도고’라는 이름을 지어, 일본 연합함대를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에게 존경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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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지도자 “일본은 떠오르는 태양” 이집트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일본을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묘사했고, 무슬림 형제단 이론가 라시드 리다는 범아시아 운동을 위해 일본의 이슬람 개종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수에즈 운하에서 쑨원을 일본인으로 착각한 한 이집트 항만 노동자는 그에게 따듯한 축하를 보냈다. 1906년에는 영국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개미성공신화
이집트 최초의 대중 봉기가 일어났다.
시베리아 타라 출신의 타타르 이슬람 지도자 압두레시드 이브라힘은 1902년 일본으로 건너와 반러시아 선전을 펼쳤다. 1904년 러시아 정부의 압력에 못 이긴 일본 정부가 오데사로 추방한 타타르의 민족지도자인 이브라힘에게도 일본은 러시아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족해방의 횃불이었다.
전 세계 주변부의 급진적 민족주의 지도자들에게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승리는 전제군주정에 대한 메이지 입헌주의 의 승리로 비추어지기도 했다. 일본의 승전고는 1906년 페르시아인들이 국회를 세우는 데 세계사적 정당성을 제공했다. 그 여파로 1908년에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민족주의 정당이 출현했고, 청년튀르크당은 술탄에게 헌정 체제의 재도입을 압박했다.
마오쩌둥은 엄중한 중일전쟁 시기에도 어릴 때 배운 일본의 러일전쟁 승전가를 또렷이 기억하면서 ‘일본의 아름다움과 자긍심, 위력’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신해혁명을 주도한 쑨원은 일본의 승리가 아시아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다고 썼다. 중국뿐 아니라 이집트·터키·페르시아·인도·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는 계기였다는 것이다. 쑨원은 일본 체류 당시 ‘나카야마(中山)’라는 일본 성씨를 썼고, ‘손종샨(孫中山)’이라는 별명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한편, 1905년 도쿄에는 아시아의 민족주의 지도자들과는 다른 부류의 인물도 있었는데, 폴란드에서 온 민족주의 지도자 피우수트스키도 그 하나였다. ‘폴란드 사회당’ 우파 지도자였던 피우수트스키는 일본이 필요한 군자금과 군수품을 제공하면 러시아의 배후에서 병참선을 교란하고 파업 등으로 전쟁 수행을 방해하는 제2의 전선을 열어 일본의 승리를 돕겠다고 제안했다.
민활한 일본군 정보부는 3만3000스털링의 군자금과 3만 정이 넘는 총을 제공하고, 러시아의 주요 거점에 사는 폴란드인 정보망을 구축했다. 특히 라트비아의 리가와 리바우의 폴란드 휴민트 정보망은 러시아 발틱 함대의 동선을 추적하고 예측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918년 11월 11일 독립한 폴란드 정부는 러일전쟁에서 공을 세운 50명의 일본군 장교들에게 군사 훈장을 수여했고, 소련을 겨냥한 폴란드군과 일본군의 합동훈련도 자주 벌였다.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 또한 ‘검은 민족들의 국제연맹’을 결성하면서 일본과의 연대를 추진했다. 이들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 대표단이 인종차별 폐지를 담은 15조 항목을 제시한 데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서구 제국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야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국제조약에서 인종차별 폐지 조항을 넣는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미국 흑인 최초의 하버드대 박사 윌리엄 에드워드 듀보이스. 그는 일본을 지렛대로 서양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포토]
1920년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들은 일본 이민자들을 ‘태평양의 니그로’라고 부르며 인종의 경계를 넘는 연대를 모색했다. 미국 흑인 최초의 하버드대 박사이자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였던 듀보이스는 1936년 만주국을 방문, 만철 총재 마츠오카 요스케와 환담을 나눈 후 서구의 백인 식민주의와 달리 만주에는 착취와 종속이 없다고 확신했다. 듀보이스는 근대 일본이 반서구 저항 민족주의의 대부라는 일본 민족주의자들의 생각을 공유했다.
식민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자로 영국의 체포령을 피해 모스크바와 베를린을 거쳐 도쿄에 정착해, 일본제국의 지원을 받아 인도의 독립을 꾀했던 찬드라 보스의 행보도 흥미롭다. 베를린 체류 당시 그는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에 포로로 잡힌 4500여 명의 영국군 소속 인도 병사들을 규합해 ‘자유 인도여단’을 창설하여 영국과 결전을 불사했다.
나치의 인종주의에 실망해 동경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대동아공영권’에 공감하는 ‘자유인도 임시정부’를 세웠다. 이 임시정부는 대동아공영권 평화회의에 참석한 독일·이탈리아·일본·소련·만주국 등 9개국의 공식 승인을 받고, ‘인도 국민군’을 창설하여 버마 전선의 일본군과 함께 인도로 진격을 꾀했다. 벵골의 국제공항을 찬드라 보스 공항이라고 명명한 데서 보듯이, 친일 민족주의자 보스에 대한 인도인들의 존경심은 식을 줄 모른다.
적의 적은 친구가 아닌 적일 때도 많아 인도와 중국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동, 동유럽의 폴란드, 미국의 흑인 급진파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반서구 저항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에서 전향한 하야시 후사오 같은 일본의 민족주의자들은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 침공 이래 일본은 서양과 ‘백년전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러일 전쟁, 제1차 세계대전, 아시아태평양 전쟁 등 서양 제국주의에 맞선 일본 저항 민족주의의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면 간디·네루·쑨원·케말 아타튀르크·듀보이스 등은 모두 일본을 지렛대로 서양에 맞선 반서구 ‘친일’ 민족주의자였다. 구한말 한반도의 개화파에게도, 청나라와 러시아에 잇따라 승리한 일본은 자강을 추구하는 조선이 좇아야 할 근대화의 모델이었다. 단지 한반도의 친일 민족주의는, 서구의 식민지였던 인도나 이집트 등과 달리, 조선이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정치적으로 불운했다.
일본의 제국 프로젝트에 동참하여 아시아 해방에 일조하고 조선 민족의 역량과 지위를 높여서 장기적인 차원에서 민족의 장래를 도모했던 그들의 정치적 판단은 일본 식민지를 겪은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니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토착 왜구’ 등의 거친 언사를 동원해 그들이 반민족적이었다는 식의 비난은 비역사적 사고의 전형을 드러낼 뿐이다.
하버드대의 라나 미터를 시작으로, 중일전쟁 시기 왕징웨이 친일 ‘괴뢰정권’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가 ‘한간(漢奸·매국노)’에서 힘의 현실을 인정한 친일 민족주의자로 바뀌는 것도 흥미롭다. 중국 정부 또한 라나 미터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일의 사열식 연단에 초청함으로써 그의 해석을 묵인했다.
일본제국을 옹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때 주변부 저항 민족주의자들을 사로잡았던 일본의 반서구 저항 민족주의가 아시아 이웃에 대한 제국주의로 전락한 역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G7 정상회담에 초청받을 정도로 큰 대한민국이 여전히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와 ‘토착 왜구’ 식의 반일 정서에 안주한다면, 일본식 저항 민족주의의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나쁜 친일 대 좋은 반일의 단순 구도에 대한민국의 과거와 미래를 꾸겨 넣는 것은 역사적으로 거칠고 논리적으로 성글고 정치적으로 미숙하다. 제3세계 민족주의의 희망이었던 일본의 반서구 저항 민족주의가 아시아 이웃을 괴롭히는 제국주의로 변질된 그 역사를 비판적으로 곱씹어보면, 친일 민족주의와 반일 민족주의의 간격은 생각보다 훨씬 좁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적의 적도 적일 때가 많다.
임지현 서강대 석좌교수. 서강대에서 서양사 전공. 대표 저서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2021), 『기억 전쟁』(2019), 『대중 독재』(2004), 『우리 안의 파시즘』(공저 199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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