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로 남은 사람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은 이름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창업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세계 경제대통령과 화장품 브랜드의 연결고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은행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수장은 경제 대통령 또는 월가의 황제라 불린다. 그리고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케빈 워시를 차기 연준 의장으로 지명했다. 하버드대 출신, 모건스탠리 임원, 백악관 보좌관, 연준 이사
모바일릴게임 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의 배경에 대한 관심이 높은 가운데 그를 둘러싼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시선을 끈다. 바로 그의 처가다.
케빈 워시
그는 글로벌 뷰티 제국 에스
바다이야기게임다운로드 티 로더 창업주의 차남이자 공화당의 거물 정치 후원가로 알려진 로널드 로더의 사위다. 그리고 이 로더 가문은 단순한 ‘화장품 명가’를 넘어, 미국 정치·외교·자본의 흐름과 오랫동안 맞닿아 온 집안이다. 특히 로널드 로더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수십 년 인연은, 이번 워시 지명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후문이다.
뉴
골드몽릴게임 욕의 작은 화장품 가게에서 시작해 미국 중앙은행 수장과 연결되는 인맥을 형성하며 산업과 정치, 경제의 경계까지 영향력을 확장해 온 글로벌 럭셔리 뷰티 제국 에스티 로더. 그 이야기는 가난하고 빠듯했던 한 이민자 가정에서 시작한다.
에스티 로더 로고
황금성오락실 가난한 이민자 가족의 딸, 배우를 꿈꾸다
헝가리에 거주하던 유대인 로즈 쇼츠는 20세기 초반 미국으로 향한다. 당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경제적 핍박이 절정이던 곳이었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 역시 생존을 위해
사이다쿨바다이야기게임 기회의 땅 미국으로 건너온 것이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뉴욕 퀸즈. 그리고 그 곳에서 역시 체코계 유대인으로 미국으로 이주해온 맥스 멘처를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1908년 7월 딸아이가 태어난다. 그녀의 이름은 조세핀 에스더 멘처(Josephine Esther Mentzer). 향후 에스티 로더 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창업자가 태어난 순간이다.
에스티 로더
원래 그녀의 이름은 헝가리에서 가장 흔한 이름인 에스테르의 애칭인 에스티(Eszti)라고 지으려 했으나 결국 조세핀으로 정했다. 대신 별칭으로 에스티(Estee)라고 불렸다. 그리고 영어식 표현인 에스더(Esther)를 미들네임으로 넣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그 이름이 세계적인 화장품 브랜드가 될 것이라곤.
헝가리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의 어린 시절은 늘 빠듯했다. 아버지 맥스 멘처는 미국에 정착한 뒤 작은 철물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렸다. 당연히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이민자의 억양과 동네는 곧 계급의 표시였다. 에스더는 자신의 출신을 자랑스럽게 말하기보다 숨기고 싶어했다.
그녀에게 처음 장사의 기술을 알려준 것은 화장품이 아니라 못과 나사, 공구였다. 아버지의 철물점에서 에스티는 손님의 눈빛을 읽는 법을 배웠다. 어떻게 물건을 팔아야 하는지, 무엇이 손님의 지갑을 열게하는지 몸소 배우며 익혔다. 이는 향후 에스티 로더의 사업 확장에 있어 독보적인 경쟁력으로 자리잡았다. 어린 시절 에스티의 꿈은 빛나는 조명과 꽃, 그리고 잘생긴 남자들과 어울리는 여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화장품 사업의 기반이 된 외삼촌의 실험
에스티 로더의 인생을 바꾼 인물은 그의 외삼촌 존 쇼츠였다. 헝가리 태생의 화학자였던 쇼츠 역시 20세기 초 미국으로 건너왔다. 화학자이자 박사 학위 소유자였던 쇼츠는 미국에 뉴웨이 연구소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 회사는 크림, 로션, 향수와 같은 미용 제품을 만들고 판매했다. 그는 정식 공장을 갖춘 사업가는 아니었지만, 피부 연고와 크림을 직접 연구·제조하던 사람이었다. 에스티는 아버지의 철물점보단 외삼촌의 화장품에 더 관심이 갔다.
에스티 로더(맨 왼쪽) 가족
그녀는 외삼촌에게 세안법과 얼굴 마사지법을 배우고 그가 만든 화장품을 직접 얼굴에 발랐다. 삼촌은 원료의 비율을 바꾸고, 질감을 손끝으로 확인했으며, 향이 지나치지 않은지 반복해서 점검했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본 것은 피부 반응이었다. 그리고 테스트 대상은 언제나 조카 에스더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녀는 본격적으로 삼촌의 사업을 도왔다. 개발 뿐 아니라 제품을 친구들에게 그 화장품을 소개하거나 나눠주기도 했다. 직접 발라주고, 직접 설명하고, 변화를 보여줬다. 그녀는 직접 ‘슈퍼 리치 올 퍼포즈 크림’이라는 이름을 붙여 친구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사업파트너가 된 남편, 조셉 라우더
그 사이 그녀는 사랑과 이별을 반복했다. 1930년, 에스더는 의류업에 종사하던 조셉 라우더(Lauder)를 만나 결혼했다. 그녀의 성 역시 라우더로 바뀌었다. 뉴욕 맨해튼으로 옮겨온 그녀는 1933년 레너드 라우더를 낳았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평탄하지 못했고 1939년 이혼했다. 하지만 결국 그 둘은 1942년 재결합해 둘째 아들 로널드 라우더를 낳는다. 그가 바로 케빈 워시의 장인이다.
에스티 로더 부부
롤러코스터같은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에스티는 화장품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매달 방문하던 미용실 ‘하우스 오브 애시 블론즈’에서 그녀의 사업이 개화하기 시작한다. 미용실 주인 플로네스 모리스는 에스티 로더의 광택나는 피부를 칭찬했다. 고객을 대하는 디자이너의 상투적인 이야기로 치부해버릴 법도 했지만 에스티 로더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에스더는 삼촌의 크림 4개를 추려 가져갔고 어떻게 바르는지 시연했다. 모리스는 그녀의 설명과 효과에 감명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새롭게 열 미용실 한켠을 내주며 그 제품을 팔아보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새긴 화장품을 미용실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에스티 로더가 탄생한다.
이름을 바꾼 에스더 라우더
흥미로운 부분은 에스더 라우더는 자신의 화장품 브랜드가 마치 고급스런 프랑스 브랜드로 보이도록 일부러 액센트 기호를 추가하고 아버지의 헝가리 억양으로 발음하도록 유도했다는 점이다. 또 남편의 성인 라우더 역시 유럽 느낌이 더 나도록 로더로 발음했다. 이렇게 미국에서 탄생한 이름이 ‘에스티 로더’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업가 에스더 라우더는 그렇게 ‘에스티 로더’라는 너무나도 유럽적인 브랜드로 재탄생했다.
에스티 로더 제품
마케팅의 귀재, 브랜드를 키우다
그녀는 손님들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시간을 공략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기다리는 시간 동안 손님들의 얼굴에 크림을 발라 피부관리를 해주고 제품을 홍보했다. 자연스레 제품에 대한 인기는 높아졌다. 물론 효능이 좋았던건 기본이다. 입소문은 뉴욕 최고의 부촌 롱아일랜드까지 도달한다. 에스티 로더는 특유의 세일즈 스킬로 롱아일랜드 상류층 여성들의 마음을 샀고 더 많은 단골을 확보하게 된다.
성공을 확신한 그녀는 1946년, 남편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건 회사를 세운다. 에스티는 제품과 판매, 조셉은 운영과 자금을 맡았다. 제품은 네 가지뿐이었고, 변변한 공장도 없었다. 실제 제조는 폐업한 레스토랑의 주방과 다름없는 공간에서 이뤄졌다. 가스버너 위에서 크림을 끓이고, 병에 담고, 라벨을 붙였다. 첫 사무실 임대료는 월 25달러였다.
고객에게 화장품을 발라주는 에스티 로더(왼쪽)
이 초라한 출발선 위에서도 에스티의 목표는 분명했다. 상류층이 애용하는 백화점에 입점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가장 좋은 백화점에. 에스티는 처음부터 최상급 매장만을 목표로 했다. 삭스 피프스 애비뉴, 니만 마커스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작은 신생 브랜드를 받아줄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수없이 거절당했었지만 결국에는 그녀의 소원대로 뉴욕 맨하튼에 위치한 삭스 피프스 에비뉴의 작은 공간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찾아온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미국의 호황기. 대소비의 시대를 맞아 화장품 산업은 본격적으로 성장했고 그 중심엔 에스티 로더가 있었다. 여성들은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나를 가꾸는 소비’를 원하기 시작했다. 에스티는 이 변화를 직감했다. 화장품은 사치가 아니라 전후 여성의 자기 관리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세계 최초로 탄생한 무료 샘플 마케팅
사업 성장을 위해 홍보가 필요했다. 특히 화장품 특성상 마케팅이 필수였다. 하지만 광고 대행사들은 자그만한 화장품 브랜드인 에스티 로더를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에스티는 다시 한번 결단을 내린다. 광고비로 책정한 금액을 전부 무료 샘플로 투입하기로. 그녀는 우편으로, 자선 행사에서, 그리고 구매 사은품으로 샘플을 뿌렸다. 이는 화장품 산업에서 최초로 도입된 무료 샘플 마케팅이다.
에스티 로더
그녀는 뉴욕의 한 고급호텔 자선행사에 립스틱 80개를 무료로 나눠주었다. 당시만해도 비쌌던 금속 소재 케이스로 제작된 립스틱은 또다시 입소문을 탔다. 많은 부유한 여성들이 그 립스틱을 구하려고 수소문했고 삭스 피프스 에비뉴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게 에스티 로더의 이름은 다시 한번 입소문을 탔다.
이 방식은 ‘기프트 위드 퍼치스(Gift with Purchase)’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재 대부분의 화장품 매장이 취하고 있는 마케팅 방식이다. 마케팅 업체가 외면하자 직접 마케팅 수단을 만들어버린 셈이다.
퇴폐적인 향수에 대한 인식전환 ‘ Youth Dew’
1953년, 에스티 로더는 신제품 유스 듀(Youth Dew)를 출시한다. 유스 듀는 목욕 후 바르는 오일로 출시됐다. 하지만 이는 당시 사회적 편견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변칙이었다. 1950년대 중반 미국에서 향수는 퇴폐적인 이미지로 인식됐다. 성적인 목적에 매몰된 이미지가 강해 향수를 뿌리는 것은 퇴폐적으로 취급됐다. 그래서 당시 향수는 사둬도 잘 쓰지 않는 골동품 같이 취급됐다. 에스티 로더는 이런 편견을 깨기 위해 유스 듀를 배스 오일이라고 명명했다. 목욕을 할 때 한두 방울 떨어트리는 용도로 출시했지만 목욕 후에도 피부에 발라 ‘향수’처럼 쓸수도 있었다. 사실 진짜 목적은 후자였다.
유스 듀 광고
목욕 오일이면서 향수로도 쓸 수 있는 제품으로 향수의 문턱을 낮췄다. 이 제품은 회사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단기간에 회사를 대형 사업으로 끌어올린다. 동시에 하나의 위험도 만들었다. 매출이 한 제품에 지나치게 집중된 구조였다.
1973년 에스티 로더는 두 아들에게 경영을 맡기고 한발 뒤로 물러났다. 장남 레너드 로더는 브랜드 전략과 인수합병을 총괄했고, 차남 로널드 로더는 정치·외교 네트워크와 대외 관계를 담당했다. 역할은 분명했다. 레너드는 회사를 키웠고, 로널드는 회사의 영향력을 넓혔다.
시작된 2세 경영과 갈색병의 탄생
이후 1982년 출시된 어드밴스드 나이트 크림, 일명 갈색병 제품은 현재 1분에 9병이 팔리는 스테디 셀러 제품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피부는 밤에 회복한다는 카피 아래 이 제품은 의료용으로 쓰이던 원료를 중심으로 하나의 의약품처럼 자리매김하며 여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이 믿음은 제품 설계뿐 아니라 용기 선택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에스티 로더는 초기부터 투명한 병을 꺼렸다. 빛은 성분을 분해하고, 고급스러움보다 불안감을 준다고 보았다. 대신 그녀가 선택한 것이 갈색, 정확히는 빛을 차단하는 깊은 앰버 톤이었다. 갈색병은 단순히 성분 보호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낮의 화려함보단 밤의 회복을 의미하는 갈색병은 에스티 로더의 시그니처가 됐다.
에스티 로더 갈색병
특히 레너드 로더의 등장은 에스티 로더를 ‘히트 상품 중심 회사’에서 ‘포트폴리오 기업’으로 바꾸는 전환점이었다. 그는 유스 듀와 갈색병 같은 베스트셀러 의존 구조를 위험으로 판단했다. 대신 브랜드를 늘려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클리니크, 아베다, 맥(M·A·C), 라메르 등 성격이 전혀 다른 브랜드들이 이 시기 에스티 로더 그룹에 편입됐다. 하나의 미학이 아니라, 여러 취향을 담는 구조였다.
성장이 가속화되면서 가족 경영의 한계도 분명해졌다. 글로벌 시장 공략, 대형 인수, 복잡해진 유통 구조를 가족만으로 관리하기는 어려웠다. 에스티 로더는 점차 전문경영인 중심 체제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가족은 전략과 방향을 제시하고, 실행은 외부 전문가에게 맡기는 방식이었다.
이 구조는 한동안 효과적이었다. 에스티 로더는 세계 최대의 프레스티지 화장품 그룹으로 성장했고, 백화점과 면세점, 글로벌 뷰티 시장의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 잡았다. 다만 세대가 내려갈수록 ‘함께 만드는 회사’는 ‘나눠 가진 지분’에 가까워졌다. 경영은 전문화됐지만, 가문의 영향력은 점점 간접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레거시의 유산, 역사를 이어가다
에스티 로더는 2004년 4월,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가 아니라, 조용히 한 시대를 마무리하듯 삶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끝났음을 의미했지만, 브랜드는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나 있었다.
그녀는 끝까지 스스로를 ‘경영자’보다 ‘세일즈맨’으로 기억했다. 광고 문구보다 손의 감각을 믿었고, 숫자보다 얼굴의 반응을 먼저 봤다. 그녀는 현업에 있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제품을 팔고 고객의 얼굴에 화장품을 발랐다고 회상한다. 좋지 않은 제품은 어떤 말로도 팔 수 없고, 좋은 제품은 결국 다시 고객을 돌아오도록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로널드 로더
글로벌 확장, 인수합병, 전문경영인 체제까지 모두 거친 지금의 에스티 로더는 오히려 ‘창업자의 방식’이 얼마나 희귀해졌는지를 보여준다. 데이터와 알고리즘, 인플루언서와 광고가 지배하는 시대에 그녀의 방식은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에스티 로더는 없었을 것이다.
에스티 로더의 성공은 화장품 산업의 변화를 가져온데 이어 미국 경제를 이끄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녀의 차남 로널드 로더의 사위, 케빈 워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으로 지명돼 세계 금융의 중심에 섰다. 부엌의 가스버너에서 시작된 화장품 브랜드가, 반세기 뒤 세계 경제의 심장부와 연결된 셈이다.
에스티 로더
물론 이는 화장품이 금융을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한 가문이 쌓아온 신뢰와 네트워크, 그리고 ‘사람의 얼굴 위에서 증명된 브랜드’라는 자산이 산업의 경계를 넘어 정치와 자본의 영역까지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에스티 로더는 죽었지만, 그녀가 만든 문법은 여전히 작동 중이다. 브랜드는 백화점 카운터를 넘어, 이제 세계의 중심부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흥부전]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