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블루문 특급’에서 “아, 왜 나는 눈만 뜨면 옆에 시체가 누워 있는 거야?”라고 외치던 브루스 윌리스가 참 귀여웠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나의 젊은 날과 함께했던 드라마였기에 생각이 난 걸까. 대학생 때 보다가 군대 가서도 몰래 봤던 TV 드라마였으니까(처음엔 야단맞다가 내무반 선임들을 설득해 결국 같이 봤다). ‘블루문 탐정사무소’ 공동대표로 일하며 썸타는 관계로 출연한 윌리스와 시빌 셰퍼드가 카메라 밖에서는 서로 앙숙이었다는 뒷얘기도 재밌다. 상병 때 휴가 나와 본 영화 ‘다이 하드’로 윌리스는 특급 스타가 됐는데도 그 드라마에는 계속 출연했고, 1990년이 돼서야 끝났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연속극을 많이 보는 편이었는데 부모님도 이상하게 그걸 말리지 않았다
신천기릴게임 . 초등학교 때는 빅 모로 주연의 ‘전투’와 나시찬 주연의 국내 드라마 ‘전우’ 중 어느 게 더 재밌나를 가지고 등하교 시간에 친구들과 다퉜다. 고등학교 때는 “뻔하면서도 재밌단 말이야”라면서 ‘게리슨 유격대’를 시청했다. 드라마 애호가도 고3이 되면 대입 준비에 바빠야 하거늘 나는 어윈 쇼의 소설 ‘리치 맨, 푸어 맨(Rich Man, Poor Man)’
놀이터 릴박스 을 드라마화한 ‘야망의 계절’을 보느라 토끼눈이 되곤 했다. 루디와 톰 조다쉬 형제와 빵집을 하던 부모 이야기는 첫 에피소드부터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았고, 루디를 쫓아다니던 악당 팔코네티는 빌런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멋진 캐릭터였다. 지금도 루디가 팔코네티에게 저격당해 쓰러진 마지막회 방송에서 무심하게 흘러나오던 뉴스 멘트가 기억난다. 정말 재밌는
최신 릴게임 드라마였는데 소설가 최인호 선생이 ‘TV가이드’라는 잡지에 “우리나라 방송 작가들은 제발 ‘야망의 계절’ 보고 좀 배워라”라는 내용의 칼럼을 쓸 정도였다.
대학 가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연애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맥가이버’라는 기상천외한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가 됐고 토요일 오후엔 가족이 아니라 ‘머나먼 정글’을 보기 위
황금성동영상 해 일찍 귀가했다. 특히 머나먼 정글은 롤링 스톤스의 ‘페인트 잇 블랙(Paint It Black)’을 주제가로 쓰는 파격을 감행했다.
인터넷도 스트리밍 서비스도 없던 시절이라 모든 드라마는 실시간 시청 아니면 재방송뿐이었다. MBC애드컴이라는 광고대행사에 다닐 때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 ‘보고 또 보고’가 화제였다. 막장 드라마라며 무시하
케이씨피드 주식 려 했으나 너무나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PD들이 쓰고 남은 VHS 비디오테이프를 가져다가 예약녹화를 걸어놓고 야근이 끝나면 집에 가서 그 드라마를 시청하고 잤다. 기계 다루는 데는 젬병인 내가 귀찮은 걸 꾹 참고 예약녹화 기능을 익힌 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여자친구는 나를 ‘아줌마’라고 놀려댔다. 데이트를 하다가도 “나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야 돼. 홍길동 봐야지”라는 망언을 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케이블TV 가입 후엔 GTV에서 ‘앨리 맥빌’이나 ‘섹스 앤 더 시티’가 방영되는 날이면 술 약속을 잡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다니던 TBWA/Korea라는 광고회사에서 내가 속한 팀은 국장부터 사원까지 여성들이 대부분이라 별명이 ‘여학생팀’이었는데도 팀원 중에 드라마나 영화를 나보다 많이 보는 사람이 없었다(여직원들에게 에로 비디오 강의도 가끔 했다). 그야말로 드라마로 점철된 한심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이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드라마 연대기를 길게 쓰냐 하면 놀랍게도, 요즘은 드라마를 잘 안 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황당하다. 너무 많아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바야흐로 스트리밍의 시대다. OTT 서비스엔 봐야 할 드라마와 영화가 넘쳐나는데 시간은 모자라 뭐 하나에 집중할 수가 없다. 뭘 볼지 정하지 못하고 제목들만 클릭하다 포기하는 걸 ‘초이스 패러독스’라고 부르는데 요즘은 아예 ‘넷플릭스 패러독스’라고 부른단다.
앨리 맥빌을 보려고 술 약속을 안 잡던 그때가 그립다. ‘풍요 속의 빈곤’이 이런 거 아닐까.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지만 떠먹을 물이 없는 뗏목 위의 조난자가 된 기분이다. 에리카 크리스타키스의 ‘어린 시절의 의미’라는 책을 보면 너무 많은 장난감은 오히려 아이들의 학습과 발달을 방해할 수 있다고 한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더 의미 있는 경험을 위해 장난감 수를 줄이고 삶을 간소화하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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