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자 법외노조인 원풍동지회와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협)의 사무실로 썼던 서울 도림동 ㅅ빌라 ‘101호’에서 1984년 개소식 고사를 지내고 있다. 김대중 정부 때 노동부 장관을 지낸 방용석 당시 노협 위원장(원풍모방 노조 전 지부장·맨 왼쪽)이 고사상 옆에 서 있다. 장남수 제공
요즘 서울 관악산을 오르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관악산 기운이 좋아 정상에서 같은 소원을 세번 빌면 이루어진다.” 누군가 말했다는데 1997년 국가부도 사태 후 직장 잃은 가장들의 양복 차림
바다신2다운로드 등산 행렬과는 다른 활기라 다행이다. 관악산을 세번이 아니라 서른번은 족히 다녔을 나로서는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한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이유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고된 사람들은 모일 장소가 없어 구로공단에서 멀지 않은 관악산을 주로 이용했다. 수시로 김밥 한줄 들고 산을 넘기도 하고 수십명이 골짜기에 자리 잡고 앉아 시국을 논하
황금성사이트 기도 했다. 공간이 절실하던 차에 드디어 지붕 있는 사무실이 생겼다. ‘101호’로 통칭하며 1980년대 민주화 운동권 사람들의 사랑방 구실도 겸한 서울 신길동 한 연립주택 ㅅ빌라(현 서울 도림동) 이야기이다.
1970년대 손꼽히는 민주노조였던 원풍모방 노조가 전두환 정권의 폭력으로 해체되기 전 불안한 상황을 대비해 조합원 모금을 비축했고
릴게임야마토 , 당시 가톨릭교구의 원주 교구장이었던 지학순 주교에게 맡겨두었다. 이 기금으로 1983년 말 “현수막을 걸기에 기가 막힌 위치”에 사무실을 사들일 수 있었다.
공장에서 쫓겨나오고 개인 전화기도 없어 더 막막하던 원풍모방 해고자들은 새집의 먼지를 닦아내며 말끔해진 유리처럼 눈이 반짝였다.
회의실, 사무실로 공간을 분리하고
바다이야기무료머니 전화기와 복사기를 들인 뒤 흩어진 사람들을 결집했다. 이즈음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이 나름의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던 시기로,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등의 민주화운동단체가 우후죽순처럼 결성되던 시기였다.
장소가 없어 관악산에서 모이던 민주노조 활동가들의 모임 장
릴게임한국 소가 101호로 바뀌었고, 1984년 3월10일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협)도 결성되었다. 사무실 개소식 날은 사람이 넘쳐 현관을 닫지 못한 채 노동 열사들의 얼굴이 그려진 병풍 앞에 돼지머리를 놓고 노동자들의 소망을 빌었다.
해고자 법외노조 원풍동지회 사무실, ‘101’호에 있던 열사 병풍. 장남수 제공
작은 사무실은 원풍동지회가, 큰 사무실은 노협이 사용하면서 공단의 노동자들이 수시로 찾아와 늘 복작복작했다.
이 사무실의 용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내 여기저기 건물에 세를 얻어 활동하던 민주화운동단체들이 건물이 셔터를 닫아 거는 저녁 시간 이후엔 회의할 사무실이 마땅히 없던 차에 유용하게 쓰였다. 거의 비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몇년 전 출간한 내 산문집에서 한 대목을 가져온다.
“김근태씨는 수배 중 이 집에 기거하기도 했고 박계동씨는 수배 중 영화제목을 암호로 통화했다. 이재오씨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유쾌했고 이해찬씨는 논리적이었다. 박우섭씨는 사람이 좋아 좌중을 편하게 하고 이부영씨는 진지했다. 한일도루코 노조 지부장을 한 김문수씨는 노협의 창립 임원이었다. 노협 실무자들은 퇴근 시간이라는 게 따로 없이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사람들로 거의 24시간 대기였다. 정파와 이념을 넘어 사람이 모이는 정거장이자 사랑방이었다. 회의가 끝나면 두부 몇모에 돼지고기 한근을 끊어와 무 듬성듬성 썰어 넣어 안주를 만들었다.
다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 아닌가, 흥얼거리며 뒤풀이 준비를 했다. 늦으면 아예 밤을 새우고 가던 민청련의 청년들은 입담 좋은 콘트롤데이터 영선 언니의 친근한 욕을 바가지로 들으면서 키득거리며 밀대를 들고 바닥을 닦았다. 이들의 밥그릇 수북이 밥을 퍼주던 노협의 노동자 ‘누이’들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몰려왔다 몰려가는 가운데 비어 가는 쌀독을 슬며시 채우는 이는 이창복 선생이었다. (…) 가끔 수지침을 놓거나 은박지 요법 같은 걸 가르쳐주기도 한 문익환 목사 옆에 옹기종기 붙어 앉아 한장의 풍경화를 만들기도 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이 집의 공로를 인정하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부터 감사패를 하나 받았다. 김학민 경기문화재단이사장은 표지석을 세워야 하는 역사적 장소라고 강조했다.
훗날 이들이 정치권의 중요한 위치에 앉게 되었을 때 내 명예처럼 들떠 박수를 보냈다. 신문에 이름이 나오면 오려 모으며 응원했다.
기대를 저버리고 그중 여럿이 길을 달리했다. 그 시절 우리 마음이, 밥값이, 사무치게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얼굴이 티브이에 나온다. 외상 청구라도 해야 하나?” ‘빼앗긴 일터, 그 후’ 2020
언어장애를 지니고도 모든 사건 현장을 뛰어다니며 사진을 남긴 민통련의 박용수 선생, 고무신을 즐겨 신던 계훈제 선생, 전태일 열사의 이소선 어머니…. 칠팔십년대 민주화운동의 일선에 있던 분들이 101호를 다녀갔다.
담배 연기 떠돌던 회의실에서 열변을 토하거나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면면의 표정이 지금도 선연하다. 그 얼굴 중 많은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곳은 법외 원풍노조와 비합법조직 노협의 공간으로 노동자들이 중심이었다. 1970년대 노동운동의 주역들뿐 아니라 1980년대 노동운동을 이끈 이들도 이곳에서 만났다. 구로동맹파업의 노동자들, 인천이나 성수지역 때로는 전남이나 구미 거제의 노동자들도 찾아왔다.
당시 최고의 오락은 퇴근하고 온 노협 회원들과 둘러앉아 막걸리에 새우깡이나 두부김치를 안주 삼아 피로를 풀다 흥이 오르면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저 놀부 두손에 떡 들고’라는 노래를 아주 구성지게 잘 부르는 친구가 있었는데 정말 가수 뺨칠 정도였다. ‘농민가’ ‘죽창가’로 시작해 ‘금관의 예수’와 ‘강변에서’를 넘나들며 늦도록 노래했다. 그땐 모여 앉으면 그렇게들 노래를 불렀다. 노래방의 리모컨은 없어도 술술 끝없이 이어졌다.
1층 모서리 끝집이기는 했으나 늘 소란했는데 항의를 받은 기억이 없으니 어쩌면 이웃들도 말없이 응원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원풍모방 출신’이란 게 발각돼 가는 공장마다 해고를 겪던 동료들이 달려와 대책을 세우며 삶아내던 국수, 펜으로 쓰던 ‘원풍 회보’들로 101호가 분주했다.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노동조합을 탄압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모여 앉아 토론하던 노동자들의 작업복 냄새도 기억한다. 매월 5천부를 발행한 ‘민주노동’을 가방에 담고 공단으로 달려가던 동료들, 하루 일을 마친 저녁에 부르던 노래와 소박한 음식이 이 땅의 노동운동, 민주화 여정에 함께했다.
파릇한 10대에 공장에서 만난 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60대 70대가 되어서도 매해 두세차례 모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놀란다. 가족도 종교도 아닌 관계의 인연을 그렇게 이을 수 있다고?
탄압에 맞서 싸운 동지애가 바탕이지만 언제라도 가면 반겨주는 공간이 있었던 게 큰 동력이었다.
해고자 법외노조 원풍동지회 사무실, ‘101호’가 44년째 자리 잡고 있는 서울 도림동 연립주택 ㅅ빌라 입구 풍경. 낡은 건물 입구 쪽 앞마당 시멘트가 갈라져 야자수 매트와 방수포가 깔려 있다. 장남수 제공
40년이 훌쩍 넘어 그 연립주택의 재개발 논란이 분분하다. 낡은 현관의 앞마당 시멘트가 갈라지고 튀어나와 야자수 매트를 두껍게 깔았다. 그마저 질척거려 방수포를 덮어씌운 상태로 열두세대 주민들이 조심조심 다닐 정도지만, 원풍동지회 사람들을 한 결로 오게 한 보금자리였다.
그때 그 사람들도 이 집처럼 늙고 소멸해 간다. 건물은 낡고 위태롭게 서 있어도 그 문턱을 넘나들던 수천개의 발자국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101호의 낡은 방수포 아래는 여전히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던 이들의 온기가 흐르고 그곳에서 지어먹던 밥심은 어딘가에서 또 다른 모양의 역사를 쓰고 있으리라 믿는다.
장남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