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 사람들의 묵직한 기록일터에서 써내려간 진솔한 사연
1926년 병인년(丙寅年) 동아일보는 ‘10년을 하루같이’라는 제목으로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일해온 사람들을 연속해 소개했다. 한 자리를 지키며 세월을 견디는 사람들의 삶을 담은 것이다. 이름 없는 노동이 쌓여 한 시대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첫 번째는 34년 동안 활판소에서 인쇄공으로 일하고 있는 조병문(趙炳文)씨 이야기다. “조선에 처음으로 활판이라는 인쇄 기계가 일본으로부터 건너오던 날부터 인쇄 직공이 되어 오늘까지 34년 1만여 일 동안을 하루같이 꾸준히
모바일바다이야기 종사한 사람이 있으니 이는 대동(大東)인쇄 주식회사 정판과장(整版課長)으로 있는 조병문(57)씨다. ‘내가 처음 인쇄 직공으로 들어가기는 25살 되던 해인가 봐. 그전까지는 조선에 활판 기계라는 것이 없었고 인쇄는 대개 목조(木造) 섞인 4호 활자판에 조선 백지를 놓고 손으로 눌러 박는 것 밖에는 없었더라니, 조선에 처음으로 창설된 활판 기계의 첫 운전을
릴게임꽁머니 내가 한 셈이지요. 이 사서원(司書院)에서 한 달에 8원인가 받으면서 몇 해 동안을 기계 운전을 하다가 이승만(李承晩)씨가 주필로 있던 제국신문사로 옮아 가서 신문을 박는 기계 운전을 하다가 3년 만에 신문사가 불에 타 버리자 낙원동에 있는 광문사(光文社)로 들어가서 삽지(揷紙)를 하다가 그만두고 땅문서 집문서를 박는 지계아문(地界衙門)에 들어가 한 2년
사이다릴게임 동안 있었지오. 내가 31살인가 32살이 되었을 때 배설(裵說)씨가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사에 문선공(文選工)으로 들어갔지요. 그때 문선공이 6~7명쯤 되는데 상투들이 뽀족뽀족한데다 곰방대를 제각기 하나씩 물고 입담배를 꽁꽁 눌러 담아서 빡빡 빨면서 문선을 하였지요. 또 이곳저곳 몇 군데 돌아다니다가 1915년인가 이 대동인쇄회사의 전신인 성문사(誠文社) 때
바다이야기게임기 에 문선공으로 들어와서 오늘까지 이 노릇을 해 먹고 있는구려’라고 말했다.” (1926년 1월 14일자)
두 번째는 13년째 산파로 활동 중인 최애도(崔愛道) 여사 이야기다. “세상 사람들이 부르기를 ‘할머니’라고 하는 직업 부인이 있으니 관훈동 66번지 최애도라는 분은 금년 33세인데 13년 동안을 한결같이 우리 조선의 제2국민이 될 옥
바다이야기게임방법 동(玉童) 옥녀(玉女)의 해산관 노릇을 한 분이랍니다. 그는 1912년에 총독부 의원 안에 간호부와 산파 양성소가 처음 설립될 때에 그곳에 입학을 하여 1914년에 제1회로 졸업을 하고 1915년 가을에야 비로소 면허를 얻어 가지고 개성에서 처음 개업을 한 후 3년 동안으로 삼할머니 노릇을 하다가 1917년 가을에 경성에 올라와서 와룡동에다가 처음 간판을 내붙였었다고 합니다. ‘내가 졸업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3년이 지났고 개업한 후에 낳은 우리 큰 딸 용희(鎔姬)가 벌써 11살이 되어 보통학교 4학년생이라니요, 그동안 내 손으로 받은 아이가 800여 명이나 됩니다. 아직까지도 우리 조선의 산파라 참 고통입니다. 지금도경성 시내는 그다지 심하지 않습니다마는 시외만 가더라도 산파라면 산모나 어린애를 잡는 귀신같이 여기는 가정이 있답니다. 내가 처음 개성에서 개업을 하고 첫 개시로 이규팔(李奎八)이란 분의 초빙을 받아 그의 손자를 받으러 갔었을 때에는 참말이지 기가 막혔습니다. 그 집에 떡 들어서니까 산모가 있는 방을 부인들이 가로막고 들여다 보지도 못하게 하며 그저 몰아내 쫓으려고만 하였답니다 13년 동안에 쌍둥이도 너덧 번 받아보았지요. 그런데 쌍둥이들은 대개 잘 자라기가 어려운 모양이에요. 우선 청석골 해동은행 영업 과장 조남준(趙南駿)씨도 연전(年前)에 쌍녀(雙女, 쌍둥이 딸)를 낳았는데 겨울 돌이 지나서 홍역으로 둘이 다 죽어버렸습니다. 산파로는 나도 상당히 버는 터이지마는 작년의 총수입이 400원 가량 밖에 못되었으니까요. 많지 않은 산파의 수입이 이렇게 적은 것을 보면 아직도 조선 사람은 산파를 모른다는 것이 증명되는 줄로 생각합니다’하고 최애도 씨는 말끝을 맺어 버렸다.” (1926년 1월 15일자)
세 번째는 17년간 방방곡곡에 우편물을 전하는 최윤덕(崔潤德)씨 이야기다. “자그만치 17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추우나 더우나 한결같이 대 경성 북부 일대를 굽이굽이 골골 샅샅이 휩쓸어가며 안 찾아가는 집이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다니는 것으로 업을 삼는 분이 있으니, 그는 광화문 우체국의 최윤덕이라는 우편배달부이랍니다. ‘내가 처음 체전부가 되었을 때는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20여명 밖에 안 되었고 내 초봉이 그때 돈으로 일금 13량 5돈이었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일급(日給)이 1원 47전이나 되었고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70여 명이나 되었으니 참말 세상은 끔찍이도 바뀌었습니다마는 (중략) 지금으로부터 8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시외 배달이 있었던 까닭에 고양군 양주군에도 차례가 돌아오면 멱서리(짚으로 촘촘히 엮어서 만든 그릇으로, 주로 곡식을 담는 데 쓰인다) 만한 가방을 메고 붉은 빛 구루마를 끌고 높은 고개 험한 산길로 편지 한 장 소포 하나를 전하려고 타박거리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도 날이 좋을 때며 기후나 고를 때면 고생이 덜 됩니다마는 비나 많이 와서 물이 많거나 눈이나 쌓여 길을 찾을 수 없는 눈보라마저 치는 때는 참말 신세 한탄에 눈물도 흘려 보았습니다. 제발 편지를 받으시는 분들은 우편 사령이란 바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시고 시간 관념들을 좀 가져 주었으면 좋겠어요. 수신인 한 분이 시간을 허비하는데 다른 수신인이 그만큼 편지를 늦게 받게 되니 그도 딱하며 나는 죄 없이 시간 늦었다고 국(局)에 돌아가서는 말을 듣지요’라고 토로한다.” (1926년 1월 20일자)
연재는 마지막으로 19년간 형사 생활을 하는 종로경찰서 김택권(金澤權)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종로 경찰서 사법계에 19년 동안을 한결같이 형사로 지내온 분이 있으니 그는 금년에 46세의 노형사랍니다. 그는 28세 때 즉 1908년 5월 26일에 한국 경시청 제2과 근무 별순검으로 들어가서 조선 총독부 순사보(巡査補)가 되었고 그 후에 본정경찰서에 근무하다가, 1920년 1월에 서대문경찰에 근무하게 되었다가 1923년 4월에 종로경찰서 사법계에 근무를 하게 된 것이랍니다. ‘내가 처음 별순검으로 배명(拜命)할 때는 나는 상투도 그대로 두었었습니다. 그때 내가 처음 근무하던 경시청 제2과란 지금으로 치면 경찰부 형사계와 같습니다. 그때는 도난계란 것이 없었고 그저 별순검들이 슬쩍 다니다가 수상하게 보면 데려다가 취조를 해 보아서 범죄가 결정되었었답니다. 그때는 번지(番地)가 아니요 통호수(統戶數)를 쓰던 때라 범인이 판명되어도 집조차 찾기가 어려운 때였었답니다. 그런데 그때는 마음대로 고문을 하였답니다. 그래서 별별 끔찍스러운 형벌이 다 많았었지요. 그러던 것이 1913년에 이르러서 통호수가 번지로 고쳐지고 도난계가 비로소 생기자 경찰은 끔찍이 밝아지고 형사들의 범인 수사도 편해졌지요 옛날 이야기 한 마디 할까요? 지금 종로경찰서 삼(森) 서장이 경시청 감독으로 있을 때 그의 지휘로 13도로 횡행하는 불한당 ’먹바지 패‘의 제3 두령 변학수(卞學洙), 일명 윤경오(尹敬五) 이하 70여 명의 대 강도단을 잡은 일이 있었는데, 그들의 동지는 800여 명으로 중국 마적떼 같은 것이었답니다. 서울 광화문통을 집합 장소로 정하고 몇십 명씩 모여 들어서 생각나는 대로 아무 데나 들이쳐 금품을 강탈하던 패였답니다. 튼튼해 보이는 장정이 있으면 산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갖은 악행을 다 하다가 살려달라고 하면 귀신도 모르게 죽여 버리고 어디까지 반항을 하면 그들 동류(同類)를 만들어 놓는 것이었답니다. 일진 회장 이용구 씨의 친산(親山) 해골을 파다 놓고 그때 돈 2천원을 가지고 와서 찾아가란 사실을 탐지하고 그 돈을 가지고 변장을 하고 경기도 광주 이뱃재 고개 부근 산속에 가서 묘구(墓寇) 배선호(裴善鎬) 외 3명도 내 손으로 잡아 보았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1926년 1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