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록 기자]
전주는 한옥마을과 조선 왕실의 본향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이곳에는 정여립의 눈물과 동학농민군의 피가 스며 있다. 그보다 훨씬 앞서 또 하나의 왕도가 있었다. 패자의 이름으로 남은 도시, 후백제의 수도 '완산주'다. 견훤은 상주 아자개의 아들로 통일신라 말의 무장이었다. 혼란한 시대, 그는 완산으로 도읍을 옮겨 의자왕의 한을 풀겠다는 명분으로 900년에 후백제를 세웠다.
후백제는 936년 멸망할 때까지 37년간 강성했다. 경주를 점령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웠으며, 고려의 왕건과 치열하게 맞섰다. 승자의 역사 속에서 패자의 흔적
바다이야기디시 은 흐려졌지만, <훈요십조> 제8조에는 왕건이 이 지역의 지세를 경계한 기록이 남아 있다. 후백제와의 전투가 절대 쉽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릴게임갓 ▲ 서고사와 진북사?서고사는 현대식 명상 본부로 탈바꿈하였고, 진북사는 서산 밑 조그만 암자다.
ⓒ 이병록
완산칠봉은 도성의 남쪽 경계이
백경게임 자 '왕의 기운이 머무는 곳'으로 전한다. 봉우리는 열세 개인데도 왜 '칠봉'이라 부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장군봉을 중심으로 남쪽 일곱 봉우리를 '내칠봉', 서쪽 일곱 봉우리를 '외칠봉'이라 구분하면서까지 칠봉을 강조하고 있다.
견훤이 전주를 지키기 위해 동서남북에 절을 세웠다는 전승을 확인하고자 '사고(四古) 사찰'
바다이야기다운로드 의 흔적을 따라 걸었다. 동고사·서고사·남고사는 지금도 절과 이름이 남아 있다. 북고사는 진북사로 바뀌었는데, 언제, 왜 바뀌었는지 기록을 찾기 어렵다.
먼저 찾은 곳은 동고산성과 동고사다. <전주성황사중창기>에 '견훤고궁터'라는 기록이 있고, 1980년 발굴에서 '전주성' 명문 기와가 발견되었다. '城(성)' 자가 찍힌 기와는 왕궁 관련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유적에서 주로 확인된다고 한다. 성곽 흔적과 발굴 결과로 보아 왕궁터로 추정되지만, 평지가 넓지 않아 평시 궁궐이라기보다 전시 거점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동고사 안내판에는 김부대왕절, 또는 진불대왕절이라는 설명이 있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뒤, 불교에 귀의한 둘째 왕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아버지, 어머니, 마의태자 등 다섯 인물을 나무로 새겨 모셨다고 전한다. 나라가 망한 뒤, 그는 왜 견훤 쪽으로 향했을까? 동고사 아래에는 바위 틈에서 물이 떨어지던 낙수정이 있었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견훤이 이곳에서 번민을 달랬다. 동고사 넘어 뒤편 300미터 지점에는 치명자산 성지가 있다. 후백제의 방어선이던 산이 오늘날 천주교 순교지를 품고 있다.
남고산성과 남고사는 천경대·만경대·억경대가 둘러싸고 있다. 현재 남은 성벽은 대부분 조선 후기 축성이다. 성안 계곡에는 마을이 살아 있고, 군대가 주둔할 만한 평지가 보인다. 끝자락의 관성묘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전주 관광 안내도에 따르면 서고산성(서고사) 주변에서 토축 성벽의 'L'자형·계단식 판축 방식이 확인되었고, 백제 기와 조각 등 유물이 수습되었다.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지만, 서고사라는 이름을 꿋꿋이 지키고 있다. 시민들에게 유적의 존재를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다. 이 산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전주성에서 보면 '서산', 효자동에서는 '홍산', 여의동·팔복동에서는 '황방산'이다.
▲ 전주 경관?동고산성 중바우와 남고산성에서 보이는 전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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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역사박물관에서 북쪽 비보와 관련해 진북사가 언급되는 내용을 발견했다. "기린봉은 왕의 기운이 있어서, 주산을 건지산으로 삼았다. 대신에 북쪽을 감싸기(비보 裨補) 위해 덕진 제방(현 덕진공원)과 숲정이 숲, 그리고 '북을 누른다'라는 뜻의 진북사를 두었다"라는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진북사를 찾아서 스님에게 언제 절 이름이 바뀌었는지 여쭈었더니, 조선말 철종 때라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주변이 진북동이고, 진북 맞뚜레(터널)를 수없이 지나다녔다. 진북사 뒷산인 서산에 혹시 성터가 있나 가봤는데, 내 눈에 띌 리가 없다. 어쩌면 산 자체가 성이었을지 모른다.
사방에 절을 두었다면 중앙에 왕궁이 있어야 할 텐데, 위치는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동고사와 서고사는 비교적 대칭이지만, 남고사는 동고사와 가까워서, 진북사가 오히려 중심에 놓인다. '사고 사찰 체계' 자체가 후대의 해석이 아니라면, 땅을 단서로 기록을 살려낸다. 이름까지 바뀐 진북사와 진북동을 북쪽 경계로 삼고, 왕의 기운이 머무는 곳인 완산칠봉을 남쪽 경계로 삼으면, 건지산이 주산이고, 완산칠봉이 안산이 되는 배치와 맞다. 동쪽과 서쪽은 해가 뜨고 지는 방향으로 보면 대강 맞아떨어진다. 전주한옥마을, 중앙동, 완산동, 중화산동과 효자동 등이 견훤의 궁궐터였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전주가 길러낸 견훤과 이성계는 전장에서는 비범했지만, 가족의 역사에서는 평범했다. 견훤은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적인 왕건에게 귀의했고, 이성계 역시 이방원의 난을 겪은 뒤 고향인 함흥으로 물러났다. 젊어서 목숨을 바쳐 전장을 누비던 장수가 말에서 내려 가족의 품에 안기면서, 혈육이라는 인간의 한계가 드러난 장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