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솟은 저 계립령은 / 예로부터 남북의 경계였는데 / 북쪽 사람들은 호화로운 생활 탐하여 / 남쪽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네 // 우마차로 험난한 고개를 넘어야 하니 / 논밭에는 장정들이 없네 / 밤이면 강가에서 서로 몸을 베고 자는데 / 아전들은 어쩌면 그리도 탐욕스럽나 // 시장에서 생선을 가늘게 회 쳤고 / 술집에는 술이 쌀뜨물처럼 허연데 / 아전들 돈 거두어 기생 불러오니 / 머리 장식 화려하고 화장은 덕지덕지 // 백성들은 살을 깎는 고통을 겪는데 / 아전들은 함부로 취해서 떠들어 대며 / 되질할 적에도 농간을 부려 대니 / 세곡 맡은 관원은 부끄러운 줄 알기를’ <이하 생략> ?
골드몽릴게임 ▲ 남한강 충주댐 방향 제방에 조성된 자전거길이 호젓하다. 사진/남궁창성
김종직(金宗直 143
황금성슬롯 1~1492년) 선생의 ‘가흥참(可興站)’이라는 시입니다. 가흥참은 충주에 있던 역참입니다. 역(驛)과 참(站)은 공문서 전달, 관리의 왕래와 숙박, 관물 수송 등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충주에는 가흥참과 함께 국영 수운창고인 가흥창(可興倉)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정은 전국에서 조세로 미곡(米穀)을 걷어 한양에 있는 경
체리마스터모바일 창(京倉)으로 운송하기 위해 연해와 하천 포구에 조창(漕倉)을 운영했습니다. 한강 물줄기에 있던 가흥창, 원주 흥원창(興原倉), 춘천 소양강창(昭陽江倉)이 대표적입니다.
경상, 충청, 강원도에서 거둬들인 세곡은 이 창고에 보관됐다 남한강과 북한강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가 용산강변 군자감(軍資監) 창고에 쌓였습니다. 이 쌀은 군량미로 활용됐
릴게임 습니다.
바닷길을 거쳐 한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온 충청, 전라, 황해도 세곡은 서강변 광흥창(廣興倉)과 풍저창(豊儲倉)에 보관됐습니다. 광흥창과 풍저창 세곡은 각각 관료들의 월급과 왕실 비용으로 쓰였습니다.
김종직 선생은 1468년(세조14년) 4월 충주를 여행하다 가흥창을 찾았던 것입니다.
바다이야기 ?
▲ 남한강 줄기와 원주 섬강이 만나는 원주시 부론면 합수머리 전경. 사진/남궁창성
당시 남쪽의 경북 백성들은 이중고에 시달렸습니다. 매년 과중한 세곡을 감내해야 하는 고통과 함께 그 세곡을 우마차에 싣고 해발 525m의 ‘하늘재’, 계립령(鷄立嶺)을 넘어 조창에 바치는 부역의 아픔까지 견뎌야 했습니다.
반면 고개 넘어 북쪽 사람들, 아전으로 상징되는 지배층은 세곡을 갖고 농간(弄奸)을 부리는 등 탐학(貪虐)했고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습니다. 세곡을 고무줄처럼 늘려 중간중간 빼먹고 그 돈으로 기생을 불러 술타령을 했던 것입니다.
시인은 하늘재를 기준으로 남쪽과 북쪽의 공간을 구분해 백성과 지배층의 상반된 현실을 시를 통해 고발했던 것입니다. 시사(詩史)라고 할 수 있죠.
다음 시, ‘여흥에 정박하다(泊驪興)’는 앞서 소개한 시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68년(세조14년) 봄 충주에 머물던 김종직 선생은 배를 타고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원주 흥원창을 거쳐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를 지나 여흥(驪興), 오늘의 여주에 잠깐 들려 갑니다. 그리고 신륵사(神勒寺)와 여흥관아 객사에 있던 청심루(淸心樓)를 찾습니다.
‘신륵사 안에서 그림을 구경하고 / 청심루 아래에 배를 매었는데 / 바람 순하고 이슬 축축한 깊은 밤에 / 모래톱에서 사랑 노래 한 곡 부르네 // 해 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은 먼 언덕, 가까운 언덕에서 사라져 가고 / 배는 완만한 물굽이, 거센 물굽이를 지나가네 / 닻줄 위에서 춤추는 흰 새는 다정스럽고 / 배의 창문 밀쳐 여니 푸른 산 셀 수 없이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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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흥 관아에 있던 남한강변의 청심루. 19세기 작자 미상의 그림이다.
‘가흥참’이 참여시라면, 이 시는 여행길 풍광을 마주하며 심경을 담은 서정시입니다.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을 관조하는 한가로운 심정을 잘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8년 뒤. 성종7년 1476년 김종직 선생은 고향 근처 선산(善山) 부사(府使)로 임명됐습니다. 부임 경로는 남한강 물길로 잡았습니다. 강을 거슬러 남쪽으로 여행하다 다시 한번 여흥을 찾습니다. 당시 지은 시가 ‘여주 청심루에 오르다(病後 將赴善山 舟過驪州 步?登淸心樓)’라는 시입니다.
‘초가집 가시나무 울타리에 배를 매네 / 물고기와 새들은 내 얼굴 알 리 없을 테지 / 앓은 뒤지만 그래도 지팡이와 짚신은 챙겼고 / 외직으로 가는 길에 겨우 강산 구경 하는구나 / 십 년 동안의 세상일을 외로이 읊는 중이요 / 팔월의 가을 풍경 어지러운 숲 사이라네 / 잠시 난간에 기대어 북쪽을 바라보는데 / 사공이 배 타라 재촉해 더 쉬지도 못하겠네.’
선생은 당시 승문원(承文院) 참교(參校)로 있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아낀 성종은 어머니가 계신 밀양 인근의 선산부사로 임명했던 것입니다.
편한 뱃길을 통해 남쪽으로 가다 잠시 틈을 내 청심루에 올라 분주했던 관직 생활을 되돌아 보는 여유를 가졌던 것입니다.
남한강은 수많은 선비와 백성들이 오가며 심경을 담아냈던 문학의 고향입니다. 또한 사람과 물산이 오갔던 물류의 중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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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시 부론면 흥원창 옛터에 세워진 안내 표지판. 사진/남궁창성
이제, 가흥창과 흥원창의 모습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충주 목계나루와 원주 부론에서 역사 속 조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달 21일 바람을 마주하며 남한강변을 산책했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여 봤습니다.
물길을 따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랫가락이 들려왔습니다. 또 “삐걱~ 삐걱.” 노 젓는 소리와 바람의 노래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초들이 토해 내는 깊은 탄식과 한숨 소리도 제 마음 속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남한강은 이날도 큰 바다를 향해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 남궁창성 원주본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