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황경림이 임란 후 대구 동구 동내동 초례산에 터를 잡고 심은 느티나무. '황경림 나무'로 불리며 잘 보존되고 있다.
조상들이 물려준 이 땅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땅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특히 지명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지형적인 특징, 주민의 삶과 흔적 등 그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만큼 개명(改名)이나 해석에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 지역에 관한 연구와 스토리텔링이 활성화되면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나 본래 가지고 있던 원형(原形
사이다쿨접속방법 )을 왜곡시키는 사례도 발견되어 문제가 되고 있다.
대구의 동쪽 끝 동내동의 초례산(醮禮山)도 그렇다. 일대는 고려 초 한반도의 패권(覇權)을 놓고 왕건과 견훤이 치열하게 싸웠던 동수(桐藪) 즉 공산전투의 한 현장이자 임란 시 의병들이 활동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의병장 면와(勉窩) 황경림(黃
백경게임 慶霖, 1566~1629)은 여느 사람과 달리 공적을 숨기고 은거한 곳으로 그를 기리기 위해 1639년(인조 17) 동호사(東湖祠)를 지었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공이 왜적을 물리친 초례산 승방골에 새로운 이름의 승방재(勝芳齋)를 지어 향사(享祀)를 해 온 곳이기도 하다.
바다신게임 1820년 순조 20년에 건립된 장수황씨 문중서당인 동호서당.
동호사가 있던 마을에는 면와가 심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여느 평범한 노거수와 달리 '황경림 나무'로 이름을 붙여 잘 보전하고 있다. 그런데 모(某) 씨가 초례산의 유래를 두고 지역 모 언론사와 인터뷰하면서
릴게임신천지 고려 태조 왕건이 혼례를 치른 곳이라서 초례(醮禮)라는 산 이름이 지어졌고, 승방재(勝芳齋)는 그가 28번째 부인을 맞아 혼례를 치렀다고 하여 크게 보도된 일이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오보이자 왜곡이다.
초례는 일반적으로 혼인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지만, 이 산 이름의 초례는 하늘에 제사(祭祀) 지내는 것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
야마토통기계 하양읍지』의 산천 조에 의하면 "재현서이십리고려태조정견훤우동수등차산제천고명위(在縣西二十里高麗太祖征甄萱于桐藪登此山祭天故名爲)" 즉 "하양현의 서쪽 20리에 고려 태조가 동수에서 견훤을 치고 이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이름이 지어졌다"고 해서 이설(異說)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신문에 크게 보도되니 정설처럼 굳어져 많은 사람이 그렇게 '잘못' 알고 있다.
팔공산, 초례산 파군재 등에서 치른 전투에서 왕건은 부하 신숭겸, 김락 두 장수를 잃고 목숨만 겨우 부지하는 쫓기는 신세였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새로 부인을 얻어 초례를 치렀다는 이야기는 상식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초례청(醮禮廳)으로 썼다는 승방재는 면와를 기리는 동호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마을에 지어졌는데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부득이 면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승방골로 옮겨 승방재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더 이상 초례산과 승방재에 관한 왜곡이 없었으면 한다.
왕건이 공산 전투 중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자 의병장 황경림이 왜적을 물리친 초례산. 왕건이 이곳에서 초례를 치뤘다는 스토리텔링은 완전 잘못 알려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창의한 의병장 면와 황경림은 주로 하양지역에서 활동했다. 『경산의 의병 항쟁』(경산문화원, 2000)에 의하면 그가 다른 의병과 함께 왜적을 소탕한 지역은 와평, 초례산, 도리천, 금호강, 반야, 창암 전투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양에만 머물며 적을 토벌한 것이 아니라, 왜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영천성 전투와 달성전투가 그랬고 망우당 곽재우가 주장(主將)으로 있던 화왕산 수성(守城) 전투에도 참가했다. 1595년(선조 28)에는 권응수와 합세하여 창암전투에서 왜적을 토벌했고, 대구 의병장 서사원이 주도한 공산회맹(公山會盟)에도 동참했다.
정유재란 때에는 명(明)의 지원군과 함께 무진에서 왜군을 격파했다. 특히, 그가 칭송받는 것은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공적을 일체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그마한 공적을 부풀려 많은 사람이 공신이 되었지만, 그는 공적을 숨기고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것에 만족했다.
후손 황봉하(黃奉河)는 이 점이 매우 아쉽다고 했다. 면와가 심은 나무는 한때 고사 위기에 놓인 때도 있었다. 일대는 대구혁신도시 조성지였다. 정지 작업이 한창 진행될 때 혹시나 하고 현장을 찾았더니 예상과 같이 주변에 흙더미가 쌓여 있었고 물길도 막힌 상태였다. 대다수 백성이 피란 가기 바쁠 때 목숨을 걸고 창의한 공의 체온이 서린 나무인데도 대접이 소홀했다.
이정웅 (사)대구생명의숲 이사장, 전 대구시 녹지과장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에게 사실을 알렸더니 부실한 관리를 지적하는 기사(2011년 9월30)를 보도했다. 그 후 당국이 잘 보존하여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안내판이 너무 외진 데 있어 찾기가 어렵다. 큰 길가 쪽에 안내판을 하나 더 설치했으면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대목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엄연히 초례산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초례봉(醮禮峰)으로 격하해서 부르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반드시 시정되었으면 한다.
이정웅 사)대구생명의숲 이사장, 전 대구시 녹지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