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에 새겨진 소박한 마침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증언하다. 사람이 살아온 시간은 결국 한 줄의 기록으로 남는다. 무덤가에 홀로 선 비석과 그 위에 새겨진 짧은 비문은 한 인간이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겪어낸 고통과 환희, 그리고 고단했던 여정이 남긴 마지막 문장이다.
화려한 수사로 점철된 유명 인사들의 묘비와 달리 이곳 망우리의 이름 없는 골짜기를 지키는 서민들의 묘비는 대개 소박하고 단출하다. 하지만 그 투박한 돌판 위에는 수만 마디의 말로도 다할 수 없는 생의 무게가 실려 있다. 평범한 삶이 지닌 숭고한 가치와 애틋한 마침표들이 모여 우리 사회의 진짜 역사를 이룬다.?
손오공릴게임기호일보는 망우리 역사공원에 묻힌 선열들의 비문으로 풀어보는 우리 근현대 역사 이야기를 4회에 걸쳐 집중 조명해 선각자들의 삶을 발굴하고?서민들의 삶의 가장 깊은 울림을 전하고자 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순환로를 걷고 있는 청소년들.
릴짱 # 효(孝)를 다시 떠올리다: 치사랑과 내리사랑
우리 속담에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망우리의 언덕을 오르내리다 보면 부모가 자식을 향해 베푸는 '내리사랑'과 자식이 부모에게 바치는 '치사랑'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황금성오락실 지극한 효성을 실천했던 강창룡·안화춘 부부 묘비.
강창룡(1879~1959)·안화춘(1875~1950) 부부는 부모 사후에도 100일 간 시묘살이를 하고 20년 동안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맨손으로
바다이야기pc버전다운 묘역의 풀을 뽑으며 지극한 효성을 실천했다.?
부부가 함께 효도를 실천한 '부창부수(夫唱婦隨)'의 모범은 1986년 후손들이 세운 기념비에 고스란히 남았다. 이들은 생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시장과 대통령으로부터 효자·효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손자인 경섭 씨가 1987년에 세운 묘비도 가슴을 울린다
우주전함야마토게임 . '당신의 크신 사랑이 있었기에 나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건만… 부디 편히 잠드소서' 부모 없이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에 보답하는 손자의 절절한 마음이 담겼다.
또한 28세에 청상과부가 되어 고향 길주를 떠나 남쪽에서 두 아들을 훌륭히 키워낸 양천 허씨 여인의 삶은 소설가 박종화에 의해 '백수정같이 맑고 난초같이 향기롭다'는 유려한 비명으로 부활했다.
시대를 가르는 날카로운 펜으로 '사람다운 삶'을 일깨웠던 기자 백윤진과 그의 빈자리를 반세기 동안 홀로 지켜온 아내 류명의 합장묘비에는 자녀들이 "못내 쑥스러워 그냥 이렇게 몇 자 적고 맙니다"라는 담백한 고백을 남겼다. 이 '쑥스럽다'는 표현은 세상 그 어떤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깊고 절절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 격동의 현대사, 사라진 이들의 안식처
망우리는 단순한 공동묘지를 넘어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남긴 흔적과 그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낸 이들의 숨결이 담긴 역사적 공간이다. 6·25 전쟁, 4·19 혁명 등 변곡점에서 산화한 인물들의 묘비에는 시대의 아픔이 압축돼 있다.
망우리 묘역 .
남선전기(현 한국전력)의 간부였던 송원섭은 북한의 인적 자원 강탈이라는 전쟁범죄에 휘말려 1950년 9월 6일 납북됐다. 아내 김창하의 묘 곁에 선 추모비는 '같은 태양 같은 달 바라보시며, 분열의 설움 다 잊으시고 어디에 계시든지 부디 평안하소서'라며 생사 불명의 고통을 달관한 위로로 승화시켰다.
이귀희 묘비.
1950년 9월 28일 수복의 기쁨 대신 자택에 떨어진 포탄으로 자녀들과 함께 쓰러진 이귀희와 두 남매의 묘비는 전쟁의 무차별성을 고요히 고발한다. '귀하게 빛나길' 바랐던 이름 '귀희(貴熙)'도 전쟁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1962년 공직 수행 중 순직한 조재희를 향해 동료들은 '광풍에 쓰러진 님이여, 얼마나 원통하게 눈을 감으셨나이까'라며 통곡했고, 4·19 혁명의 불꽃이었던 스무 살 청년 박동훈은 '향년 이십으로 이곳에 자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민주주의의 뿌리를 증언한다.
# 나 다시 돌아가리, 애절한 망향가(望鄕歌)
망우리는 안식처인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정거장이기도 하다. 박호열의 묘비는 분단이라는 시린 상처를 응축한 절규다. 생몰 년도조차 없이 '삼팔이북 고향을 애절히 그리던 분'이라 적힌 비문은 실향민에게 남쪽의 삶이 그저 유예된 시간이었음을 암시한다.?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다 눈을 감은 박춘근·임광춘 부부의 사연 또한 비극적 가족사를 대변한다. 1961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 김찬일을 위해 아들 근식 씨가 눈물로 세운 비석은 당대 최고의 학자와 서예가가 참여한 걸작으로 고향을 떠나 살다 끝내 돌아가지 못한 고인의 생애를 칠언율시로 노래했다.
42세의 나이로 떠난 어머니 김화선을 기리며 네 딸이 세운 비석에는 신의주에서 내려와 용산에 정착했던 고단한 세월이 담겨 있다. 70여 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딸이 세운 '진주 류씨(은경)'의 영문 묘비에는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와 함께 '우리의 젊은 엄마(Our Young Mother)'라는 애틋한 그리움이 새겨져 있다.
#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한 사랑의 연대기
망우리에는 남겨진 이들의 슬픔이 파격적이고도 진실한 고백으로 승화된 비석들이 많다. 젊은 아빠 정윤옥을 위해 자녀들이 가꾼 '수려동산'에는 '아버지의 두 귀 잡고 뽀뽀하며 안녕을 빕니다'라는 살가운 애정이 흐른다.?
1957년 스물아홉에 떠난 원종재 님의 묘비에는 '엄마는 잠시 주무시는 거란다'라며 아이들을 달랬을 남편의 배려가 '어머니 주무시는 곳'이라는 포근한 문장으로 남았다.
1956년 아내 오옥희를 보낸 남편 최용한은 '불너도 대답업는 가엾은 님아'라며 소리 나는 대로 적은 절절한 망부가(亡婦歌)를 남겼다.
오순애 ·박은히 묘비.
스물네 살 아내 오순애를 보낸 하진원은 '하날 문이 열리다'라고 축복하면서도 자신을 아내의 분신인 '갈린몸'이라 칭하며 지독한 상실감을 드러냈다.
특히 「망우리비명록」의 표지이기도 한 박은히와 남편 정훈의 기록은 압권이다. '편안치 않지만 잘 터이니 깨우지 말우'라는 아내의 마지막 유언을 비석에 새기고 스스로를 아내의 분신이라 칭하며 영원한 재회를 기약한 남편의 비명(碑銘)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비석 위를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다.
# '흥남철수의 영웅' 현봉학 박사가 쓴 막내동생의 비문?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 박사가 6·25 전쟁 발발 보름 전, 동생을 위해 세운 절절한 비문이 망우리에 있다. ?비문의 주인공은 현 박사의 동생 현요한이다.?
18세 꽃다운 나이에 숨진 동생을 위해 현 박사는 1950년 6월 10일 비석을 세웠다. 우측면의 '언니 봉학 세움'이라는 문구에서 '언니'는 당시 형을 부르던 서울말이다.
비문 후면에는 '어여간(에어간) 나의 마음'이라는 표현으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어머니 신애균 여사의 슬픔이 담겼다. 함남 함흥의 명문 기독교 집안이었던 이들은 비극적 죽음을 '잠'과 '주 계신 곳'으로 승화시켰다.
전쟁의 포화가 닥치기 직전, 동생을 가슴에 묻었던 현 박사의 애끓는 형제애와 신앙심은 훗날 흥남 철수 작전에서 10만 피란민을 구한 인류애의 뿌리가 됐다는 평가다.
# 노고산 무연고 유골들의 안식처, 비문에 숨겨진 거장의 필치
망우리에는 1930년대 도시 개발에 밀려 정든 땅을 떠나온 혼백들을 기리는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가 서 있다. 1938년 노고산(서강대 뒷산) 공동묘지가 택지로 개발되면서 연고 없는 유골들이 쏟아져 나왔다.?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개발을 주도한 회사(사장 박보양)는 이들을 망우리로 옮겨 합장하며 비석을 세워 '신을 저버릴지언정 산 사람을 저버릴 수 없다'는 건설자의 고뇌와 이름 모를 유골들이 이제는 큰 이불을 함께 덮듯 편히 쉬기를 바라는 애끓는 연민이 담겼다. 특히 이 비문은 당대 최고 문장가인 변영만 선생이 짓고 글씨는 김흡이 머릿글은 오세창의 작품으로 당대 대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 비석이 건네는 이정표
망우역사문화공원 언덕의 비석들은 단순한 죽음의 기록이 아니라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해 온 민초들의 생생한 증언록이다. 화려한 수사보다 투박한 진심이 담긴 이 비문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지극한 사랑 위에 세워졌는지를 말이다.?
비석에 새겨진 마지막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는 일은 곧 우리의 뿌리를 찾는 여정이다. 이 낮은 목소리들이 시대를 넘어 오늘의 우리를 위로하고 내일을 향한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한다.
구리=윤덕신 기자 dsyun@kihoilbo.co.kr
<이 기사는 「망우리 비명록」 공동저자인 한철수 향토사학자의 도움으로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