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동해시 묵호역으로 가는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동해 풍경. 동해=김원철 프리랜서 기자


올해도 소란하고 치열했다. 연습장 넘기듯 달력을 휙휙 넘기다보니 어느새 열두달 중 한달도 채 남지 않은 지금. 조용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질 때다. 인구도 적고 면적도 작지만 그 지역만의 이야기를 품은 소도시 여행이 최근 주목받고 있다. 11월20일 강원 동해시 묵호동을 찾았다. 걸어서 30분 남짓이면 아기자기한 옛 도심과 동해의 풍경을 함께 즐길 수 있어 뚜벅이 여행객의 명소로 떠오른 곳이다.
손오공릴게임


전망대 ‘도째비골 스카이밸리’.


서울에서 KTX로 2시간30분이면 묵호에 닿는다. 묵호역 도착 20분 전부터 조용하던 기차 안이 갑자기 휴대전화 카메라 셔터 소리로 가득 찬다. 왼쪽 창밖으로 동해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골드몽 . 부지런히 창가 자리를 잡은 이들은 멋진 사진을 남기느라 손이 바쁘다.



동쪽바다중앙시장 앞 돈다발을 물고 있는 강아지 동상.


아담한 묵호역에 내리자 혼자 여행 온 젊은 여행객들이 제법 많다. 최유민씨(27·서울 사아다쿨 동대문구)는 “직장을 잠시 쉬고 연말을 혼자 조용히 보내러 왔다”며 “큰 계획 없이 잘 쉬다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소도시 여행의 매력은 대단한 계획이 필요 없다는 데 있다. 빽빽한 일정 대신 여유를 즐기며 작은 도시를 깊게 알아가는 여행이다.
역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걸으면 묵호 중심지인 발한삼거리가 나온다. 이 일대는 오션릴게임 1940년대 묵호항이 개항하면서 오징어잡이·명태잡이 배가 드나들고 무연탄·시멘트 수출로 호황을 누렸다.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입에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금 묵호는 고단했지만 좋았던 시절을 지나 잔잔한 감성을 찾는 여행자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다.



릴게임몰 덕장에서 말린 명태를 손질하는 주민들.


지역 감성이 묻어나는 가게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동쪽바다중앙시장 옆 뉴월드상가의 ‘111호 프로젝트’에선 LP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사진작가인 주인장이 찍은 묵호의 모습을 여러가지 굿즈로 만들어 판매하고, 이곳의 숨겨진 볼거리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로컬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라면 먹고 갈래요?”



영화 ‘봄날은 간다’ 촬영지 삼본아파트.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이 대사는 기억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묵호를 배경으로 했다. 두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싹트던 삼본아파트로 향했다. 낮은 아파트 사이로 파란 수평선이 보이는 낯선 풍경이 나타난다. 봄이 아닌 겨울임에도 그 주변이 모두 영화 필름 속 한 장면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소품 가게 ‘111호 프로젝트’ 내부.


반대편으로 눈을 돌리자 명태를 말리는 덕장이 끝없이 이어진다. 옛날부터 묵호엔 명태뿐만 아니라 오징어·대구·가오리를 말리는 덕장이 많았다. 올해초에 말려둔 명태를 정리하던 이형국 상천물산 대표는 “12월 중순부터 2월까지 가장 추운 겨울에 작업한다”며 “기후변화로 명태가 많이 잡히지 않을뿐더러 해외에서 원물을 대량 가져가는 탓에 옛날보다 작업이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덕장마을엔 현재 6가구가 가업을 잇고 있다. 돌담에 그려진 귀여운 명태 벽화와 덕장마다 명태를 걸어놓은 겨울 풍경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묵호 주민들의 삶을 그린 논골담길 벽화. 골목마다 각각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묵호항을 중심으로 산비탈엔 좁고 가파른 골목과 집이 촘촘히 모여 있다. 골목 따라 조성된 논골담길 네 갈래에선 주민들이 직접 그린 벽화를 볼 수 있다. 생선을 파는 어머니, 연탄을 지고 오르는 아버지…. 그들의 삶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길의 정상엔 묵호등대가 있다. 등대 앞에서 내려다보면 하늘과 맞닿은 바다와 서로 어깨를 겹친 집들이 그리스 산토리니를 연상케 한다.



색색깔 테트라포트가 인상적인 어달항.


조용하고 포근한 미항을 찾는다면 어달항에 가보시라. 묵호항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어달항은 규모는 작지만 어선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어 활기가 넘친다. 방파제에 앉아 시간을 낚는 낚시명소로 유명한데, 요즘은 알록달록한 테트라포트 덕에 사진 명소로도 입소문이 나고 있다.



논골담길 정상에서 내려다 본 마을 전경.


산책하듯 이곳저곳 걷다보니 도시가 익숙해지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기 전, 아담한 소도시에서 차분히 한해를 보내주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