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거로 관직에 나아가다
1879년 발간된 ‘광주읍지’ 재학(才學)편에 “문정공 (김)태현의 7대손으로 태종 때 은일(隱逸, 천거)로 형조참판과 황해감사를 역임하고, 일찍 관직에서 물러나 원지(園池)를 가꿔 부용정이란 편액을 걸고 고을 사람들과 더불어 여씨의 남전향약과 주자의 백록동 규약을 시행해 풍교(風敎)를 장려하였는바, 광주의 향약은 이때부터 시작됐다”라는 기록이 있다.
부용정 편액
바다이야기릴게임 이 기록의 주인공이 바로 광주 향약을 처음 시행한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다.
광주 향약을 처음 실시한 김문발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많지 않다.
‘태종실록’에 는 김문발의 삶을 압축해 기록한 졸기가 실려 있다. ‘졸기’는 김문발이 광주 출신이고, 과거가 아닌
릴게임사이트추천 은일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사람됨이 공손하고 청렴하고 간묵한 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간묵’(簡默)이란 과묵하다는 뜻으로, 언행이 무거웠음을 보여준다.
김문발은 문정공 김태현의 7대손이며, 부친은 참판에 증직된 김거안이다. 1359년(공민왕 9)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황산 마을)에서 태어난 후 고싸움으로 유명한 칠석동으로 옮겨 살았다.
릴게임예시 호는 부용정, 본관은 광산이다.
김문발이 마지막 받은 관직은 황해도 관찰사(감사)였다. 이로 인해 문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김문발은 문·무를 겸비한 무관으로 봐야 한다.
그가 무관이었음은 칠석동에 건립된 신도비의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총명하고 학식이 뛰어나 10여 세에 제덕을 겸비했으며, 무예에도 남다르게 뛰어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나 문무를 겸전하였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의 마지막 관직이 황해도 감사였지만, 그가 받은 관직의 대부분은 수군과 관련된 무관의 직책이었다. 광주에서 향약을 처음 실시한 김문발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반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태종대 수군의 명장이었다 황해감사를 지낸 김문발은 나주 출신 정지를 이은 수군의 명장이었다. 이미
바다이야기APK 살핀 대로 김문발의 출사는 과거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그가 받은 첫 관직은 알 수 없지만 ‘태종실록’의 졸기에 도평의녹사 출신으로 나온다. 이어 “홍무(洪武) 병인(丙寅)에 전라도원수를 따라가 왜구를 남원·보성에서 물리친 공로로 이름이 알려졌다”는 기록도 이어진다. 도평의녹사는 고려 후기 최고 권력기구였던 도평의사사에서 문서 취급과 공문 전달 등의 일을 맡은 8-9품의 하급 관리로 추정된다. 그런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졸기에서 보듯 홍무 병인년(1386)에 남원·보성에 침입한 왜구 격퇴였다.
김문발은 왜구 격퇴의 공을 인정받아 1394년(태조 3) 무렵 돌산(전라남도 여수시) 만호에 임명된다. 돌산만호 시절, 그는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운다. 태조 3년(1394) 3월17일자 ‘태조실록’에 “수군첨절제사 김빈길과 만호 김윤검·김문발 등이 왜적의 배 3척을 잡아서 다 죽였다”는 기록이 그 증거다.
이에 태조는 사자를 보내 궁시(弓矢)와 비단, 은그릇을 내려 격려한다.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운 후 김문발은 돌산 만호에 이어 순천부사에 임명된다. 순천부사 시절 아들을 낳았는데, 너무 기뻐 이름을 순천의 옛 이름인 ‘승평’(昇平)으로 짓는다. 승평은 훗날 전주판관을 지냈으며, 1455년(세조 1) 원종공신에 녹훈된다.
순천부사 이후 다시 수군 장수로 복귀했고, 눈부신 활약을 한다.
‘태종실록’ 6년(1406) 3월24일자에는 “전라도 수군 단무사 김문발이 항복한 왜인 만호 임온과 경상도 병선압령(兵船押領) 상진무(上鎭撫) 어원해 등과 더불어 안부도를 수색해 적선 한 척을 잡았다, 적의 배에 탄 자가 40여 명이었는데 모두 바다 가운데 몸을 던져 죽고, 8급을 베어 바쳤다”는 기록이 그 증거다. 이에 태종은 김문발에게 궁온(宮?, 임금이 하사하는 술)을 내린다.
전라도 수군 단무사는 수군첨절제사로 종3품에 해당한다. 안부도는 전라도 내의 섬으로 보이는데, 현재 어떤 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김문발은 이후에도 수군 장수로 근무했음이 ‘실록’ 곳곳에서 확인된다. 1408년(태종 8) 1월에는 “경기수군도절제사 김문발을 충청·전라도수군도체찰추포사로 삼는다”는 기록이, 1412년(태종 12) 12월에는 “전라도수군도절제사로 삼는다”는 기록이, 1413년(태종 13) 4월에는 “경상도 수군을 좌·우로 나누고 김문발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삼는다”는 기록이, 1416년(태종 16) 3월에는 “호부(虎符)를 전라도수군도절제사 김문발에게 주니, 김문발의 계문에 따른 것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김문발은 태조대에 돌산만호에 임명된 후 태종대에 전라도수군단무사, 경기도수군도절제사, 전라도수군도절제사, 경상좌도수군도절제사에 임명되고 있다. 태종대 김문발은 경기도·전라도·경상좌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최고책임자였다. 수군도절제사의 품계는 정3품이었다.
부용정 김문발이 마지막 받은 관직은 1418년(태종 18) 1월13일 임명받은 황해도 관찰사였다. 그러나 병이 들어 3월경에 사직하고, 4월 초순 60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광주 향약을 처음 실시하다 부용정 김문발은 수군 장수로 일생을 보낸 인물이지만, 오늘 우리들에게 기억되는 포인트는 광주에서 향약을 처음 시행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향촌의 자치 규약인 향약의 시초는 송나라 때 남전현에 살던 여씨 4형제가 실시한 ‘남전여씨향약’인데, 이 향약을 주자가 가감해 발전시킨 것이 ‘주자증손여씨향약(주자향약)’이다. 주자향약은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실려 고려말 전래되지만, 곧바로 실시되지 못했다.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향리였던 함흥에서 ‘향헌 41조’를 제정하고 효령대군으로 하여금 반포, 실시한 것이 처음이었다.
조선시대에 보급·시행된 향약은 우리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상부상조의 정신에 유교적 가치를 더해 재편한 것이었다. 즉, 유교적 예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해 도덕질서 확립과 미풍양속 진작을 도모하고, 재난 시 상부상조를 위한 규약이었다.
김문발이 광주 향약을 처음 실시했다는 기록은 이미 언급한 ‘광주읍지’ 외에도 1816년 후손인 김만직이 광주목사에게 올린 청원소 ‘소지’(所志)나 1850년대 작성된 ‘광산김씨세장’(光山金氏世狀)에서도 확인된다. 광주 향약을 실시한 시점에 대해서는 병을 핑계로 고향에 머물렀던 1411-1412년경으로 보기도 하고, 김문발의 휴직기였던 1409-1410, 혹은 1414~1415년으로 보기고 한다.
김문발이 시행한 광주 향약은 ‘수암원지’(秀巖院誌)의 “광주 향약은 태종 때에 김문발의 주도로 향약이 입조돼 시행됐으나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을 뒤에 이선제가 다시 주도해 향적을 작성하고 향약을 시행하기 시작했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널리 행해지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수암원지’는 이규하 등이 수암서원의 건립 전말을 기록하고 필문 이선제, 청심당 이조원, 이소재 이중호, 동암 이발, 남계 이길 등의 행적을 정리한 책이다.
김문발이 처음 행했다는 광주 향약은 오늘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김문발의 향약을 계승해 실시한 분이 ‘수암원지’의 기록에서 보듯 이선제였다.
‘수암원지’에는 이선제가 광주 현감 안철석과 함께 실시한 향약 3장과 부칙 24조목의 내용이 남아 있는데, 이는 김문발이 처음 실시한 향약을 계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선제가 시행한 광주 향약 제1장은 부모에게 불순한 자, 형제끼리 서로 싸우는 자, 가족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 고을의 연장자를 능멸한 자 등에 대해서는 가장 엄한 상등의 죄로 논하고 집강이 관청에 올려 법률로 죗값을 치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2장은 친척끼리 불목한 자, 정처를 소박한 자는 중등의 죄로 논하는 등 향촌민들이 지켜야 할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제3장은 회의 시의 불참자나 회의 문란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선제가 죽고 난 후 광주 향약이 얼마나 지속해서 계승, 발전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만들어져 100여 동안 시행된 양과동 동약을 분석해 보면 이선제가 시행했던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이는 김문발에서 시작된 광주 향약이 이선제를 거쳐 양과동 동약으로 계승, 발전됐음을 보여준다.
- 부용정, 현장을 가다
광주 향약 최초의 시행지는 김문발의 별서인 부용정이다. ‘광주읍지’ 누정편에 “부용정은 주의 서남쪽 30리에 있는데, 감사 김문발의 별서(別墅)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김문발의 별서이자 향약 시행처였던 ‘부용정’(芙蓉亭)은 연꽃을 꽃 중의 군자라고 칭송했던 북송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 담긴 뜻을 취해 이름을 지었다.
김문발의 별서, 부용정(광주시 남구 칠석동)
1411년 무렵 건립된 부용정은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한다. 김문발의 후손인 김봉현이 쓴 ‘부용정 중수기’에는 “병화를 여러 번 겪을 세월과 계절이 바뀌길 아득히 쌓인 것이 400년이 되다 보니, 위로는 비가 내리치고 곁으로는 바람이 몰아쳐 기와는 대부분 새고 기둥은 절반 이상이 흔들려 장차 무너지게 생겼다”라는 기록이 그 증거이다.
부용정은 김봉현 등에 의해 1865년 중수됐고, 그 본모습을 오늘까지 유지하고 있다. 지금 부용정은 현판과 양응정, 고경명, 이안눌, 박제형 등 후대 명유의 누정제영을 새긴 편액이 걸려 있어, 누각의 품격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덕산사가 들어선 김문발의 집터(광주시 남구 칠석동)
김문발이 살았던 부용정 가까이의 집터는 지금 덕산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 김문발의 옛 집터는 아들 승평(전주판관) 손자 숙손(신창 현감), 증손 진(서산군수)로 이어지면서 보존됐지만, 1695년(숙종 21) 후손인 선명이 화순 동복으로 이거하면서 외손에게 넘겨진다. 이후 홍씨, 이씨, 신씨, 송씨 등이 이어 살아오다, 2011년 송윤호의 따님에 의해 덕산사가 신축된다.
부용정이 정자 옆은 지금 칠석동 고싸움 놀이전수관이 들어서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됐을 때 식전 행사에서 한국인의 기상을 전 세계인에게 보여준 것이 칠석동 고싸움이었다. 지금 칠석동에 고싸움 놀이전수관에는 당시의 ‘고’가 간직되고 있다.
부용정 옆 은행나무
부용정 표지석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부용정 가까이에는 명품 은행나무도 있다. 일설에는 김문발이 심었다고 해서 수령을 650년으로 보기도 하지만, 김문발이 부용정을 만들면서 남쪽에 행단(杏壇)을 축조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800여 년으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