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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지환어 (25-03-06 12:23)
 조회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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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지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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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들인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왼쪽부터) .
19세기 후반 한국근대사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인식된 세력은 역시 ‘개화파’일 것입니다. 수백 년 동안 굳게 닫혔던 나라의 빗장이 열린 시점에서, 서양의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정치와 제도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했던 세력. 그들이 1884년 일으킨 실력 행사는 ‘삼일천하’라는 조소 섞인 말을 들을지언정 좀처럼 ‘쿠데타’로 불리지는 않습니다. ‘정변(政變)’이라는 훨 신용불량자가되면 씬 점잖은 말, ‘갑신정변’이라 표현되죠.
고종을 끝까지 호위하다 청군에게 살해된 홍영식을 제외하면,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은 모두 망명했습니다. 망명! 김광균 시인이 ‘추일서정’에서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라 읊었듯, 이것은 (주로 철없고 물정 모르던 시절에는) 얼마나 감상적이고 낭만적으로 들리는 직장구하기 단어였던가요. 젊은 그들이, 빼어난 ‘진보(進步)’ 사상을 지니고 있던 그들이, 나라를 새롭게 바꿔 보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고국을 등지고 타지로 표표히 떠났다…
그런데.
실제 삶은 소설처럼 그런 멋있어 보이는 대목에서 막을 내리거나 얼버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다음부터의 생활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이죠.
부동산 중개업소망명 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활했던 것일까.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도 있습니다. 근대 지식인 윤치호(1865~1945)의 일기입니다. 말년의 친일 행각으로 비판의 대상이 돼 온 인물입니다만, 그것 때문에 그가 남긴 방대한 기록의 신빙성을 모두 의심하는 것 또한 합리적인 일이 아닐테죠.
윤치호는 1880년대부터 1940년 롯데캐피탈주부대출 대까지 60여 년에 걸쳐 일기를 썼고, 1889년 이후엔 모두 영문으로 썼습니다. 이 내용은 이미 국사편찬위원회가 모두 번역해 인터넷을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근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료 중 하나로 평가 받습니다. 국내외 정세와 지방 사회의 동향, 정치권의 중요 인사들과 교류해 얻은 고급 정보 등 다른 자료에서 볼 수 없는 내용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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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지식인 윤치호.
이 방대한 일기 중 1897년의 한 일기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이 때는 이미 김옥균은 암살됐지만, 1894년 갑오개혁 과정에서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져 박영효와 서광범이 복권돼 귀국한 이후였습니다. 1895년 박정양 내각에서 박영효는 실세인 내부대신에 올랐고, 서재필을 설득해 이해 12월 그를 귀국시켰습니다. 돌아온 서재필이 독립협회 관련 활동을 벌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897년 11월 10일, 윤치호는 서재필에게서 들었던 ‘갑신정변 뒤 개화파의 사정’을 이렇게 일기에 기록합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그리고 내(서재필)가 일본으로 갔을 때 일본인들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모스(Morse)씨가 우리에게 매달 100달러를 줬는데, 김옥균이 70달러를 가져가서 우리 셋에게는 30달러만 줬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는지, 우리가 사용하던 일본식 담요에 벌레가 버글거릴 정도였습니다. 마침내 김옥균이 돈을 빌리러 다닌다는 구실로 우리를 완전히 떠났습니다. 서광범과 나는 비밀리에 미국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습니다. 박영효가 이 사실을 알고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떠났습니다.”
백면서생 출신의 개화파들에게 망명이란 ‘인생이 실전’임을 깨닫게 해 주는 신산한 현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재필의 폭로는 계속됩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우리는 좋은 아파트를 빌려서 도시의 부유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저명한 인사들을 접대하고 나서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 방법은 적어도 처음에는 잘 먹혔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속임수로 언제까지나 살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김옥균이라는 우월한 존재에서 자유로워진 박영효는 거만하게 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나 아일랜드인이 운영하는 가구점으로 일자리를 찾으러 갔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그들과 더 이상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14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 제가 낯이 뜨거워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갈수록 태산입니다.
“워싱턴에서 빈약하게 번 돈으로 서광범을 몇 번이나 도와줬습니다. 서광범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게으른 사람으로, 돈이 생기면 마치 백만장자라도 된 듯이 함부로 썼습니다. 박영효는 최고로 잘났지만 지극히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내게 금전적인 신세를 졌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편지를 한 번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고인이 된 왕후께서 내게 전해주라시며 박영효에게 2000달러를 하사하셨습니다. 박영효는 이 돈을 서광범에게 건네면서 그가 내게 잘 전달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서광범은 내게 400달러만 보냈고, 나머지는 삼켜버렸습니다.”(김태웅 ‘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에서 재인용)
1947년 7월, 49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가운데). 왼쪽은 김규식, 오른쪽은 여운형 /국사편찬위원회
도대체 미국까지 가는 뱃삯은 어떻게 마련했는지, 어떻게 미국에서 고급 아파트를 얻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그 직후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 진술입니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는 1948년 김도태가 쓴 ‘서재필 박사 자서전’에서, 개화파 인사들이 글씨를 판 돈으로 노자를 마련해 미국행 차이나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는 서재필의 회고 내용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들의 미국 생활에는 일본 개화파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 등의 후원이 있었다는 후쿠자와 자신의 기록도 설득력이 있다고 짚습니다. 저 서재필의 폭로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감췄을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
윤치호는 서재필의 미국인 부인이 조선인들을 매우 경멸하고 있으며, 서재필은 한 번 빌린 돈을 좀처럼 갚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모두 일기에 기록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자살했던 전처의 무덤을 찾지 않았고 옛 장인이 찾아왔을 때 2달러를 건네 줬다는 얘기, 길거리에서 감히 자신에게 다가온다며 막일꾼을 발로 걷어찼다는 얘기도 모두 기록했습니다. 윤치호는 서재필이 매달 조선 정부로부터 ‘고문’의 봉급으로 300달러(1500냥)를 받고 있는 사실을 두고 ‘횡재’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윤치호는 그래도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서재필을 존경했는데, 1897년 10월 8일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박사의 능력이 그 결함을 보완하고 있다.”
초년 기자 시절,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고 잘 알려진 인물을 직접 만나 보면 의외로 실망스럽거나 좋지 않은 소문이 있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을 보고 실망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상의 인물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윤치호의 일기에 드러난 개화파의 ‘민낯’ 또는 누군가의 ‘날조’일지도 모를 이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교과서에 실릴 일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윤치호의 전언이 모두 사실은 아니리라 믿습니다만, 일부 사실이라 해도 개화파 인사들의 역사적인 업적까지 폄훼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진보(進步)’라는 개념이 언제나 ‘정의(正義)’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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