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7-29일간 DMZ와 파주 인근에서 열릴 ‘DMZ세계문학페스타 2026’은 전쟁과 분단, 혐오와 차별,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연속 기고 '다시 문학이 말을 건넬 때'는 분단과 경계, 평화, 민주주의, 디아스포라, 마이너리티라는 다섯 가지 의제를 중심으로, 세계의 문학이 경유해 온 고통의 역사와 그 너머의 가능성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어보고자 기획되었습니다. <기자말>
[박소란]
처음 '마이너리티'를 주제로 글을 주문받았을 때, 나는 내가 적절한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는 얼핏 나의 일상과는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거리가 먼 주제라고 여겼다. 내 주변에는 여러 명의 성소수자 동료들이 있고 장애인 친구들이 있다. 동네 식당에서 안면을 튼 결혼이주여성, 취재차 만나 얼마간 알고 지낸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주노동자와 재일조선인 가족도 있다. 그렇지만 그 당사자라 할 수 없는 내가 어떤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다. 마이너리티로부터 나는 얼마나 가까운가? 정말
골드몽 이지 먼가? 생각을 거듭할수록 나의 염려는 조금씩 방향을 바꾸게도 되었다.
곰곰 되짚자면 나는 정작 단 한 번도 이 사회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없다. 현재 나의 정체성을 요약하자면 40대, 비혼, 여성, (시인)이라 할 수 있을까. 거의 모든 시스템이 가족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부모, 형제, 배우자 없이
골드몽 가족의 테두리 바깥에 위치해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이 겪는 불안의 면면은 결코 적지 않다.
'만약에……'로 시작되는 갖가지 가정들에 휩싸일 때면 끝없이 불어나는 근심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다. 더욱이 최근에는 '40대 여자가 결혼에 실패한 이유' '노처녀의 자기객관화 수준' 등과 같은 제목의 영상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악의에 가득 찬 댓글들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은 차치하더라도, 결혼을 하지 않은 자체만으로 엄청난 혐오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마이너리티'라는 개념에 대해
황금성릴게임 ▲ ?영화 <더 랍스터> 스틸컷
ⓒ (주)영화사 오원, (주)브리즈픽처스
이즈음 요로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더 랍스터(The Lobster)>를 다시 보면서는 생각이 더 많아졌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 독특한 영화에서는 짝을 찾지 못한 사람은 동물로 변해 숲속에 버려진다. 사회가 정한 규칙이 그렇다. 만약 커플 되기에 실패한다면 어떤 동물이 되고 싶은가요? 질문을 받은 주인공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답한다. 랍스터가 되겠다고. 100년 넘게 사는 데다 귀족적인 푸른 피를 가지고 있으며 평생 번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라면 어떤 동물을 택할까? 잠시간의 고민 끝에 독수리, 사자, 표범 등을 떠올렸다. 가급적 최상위 포식자가 되어 별다른 생존 위협 없이 서식지 내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 역설적으로 이를 통해 지금의 내게 결여된 환경적 요소가 어떤 것인가 짐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내 씁쓸해졌다.
마이너리티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정의는 쉽지 않다. 시대나 국가에 따라, 국가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규정될 수 있는 까닭이다. 마이너리티 개념의 여러 유형을 국가별로 상세하게 조명한 <마이너리티란 무엇인가>(유효종·이와마 아키코 엮음, 한울아카데미)에 따르면, 민족·인종·종교·언어라는 네 가지 면에서 다수파와 다른 특징을 지녔다고 생각되는 소수파를 마이너리티로 정하는 유형(독일, 러시아, 중국)이 있는가 하면, 이 네 가지 특징을 중시하기보다 '약자' 일반을 마이너리티로 보는 유형(미국, 일본)이 있다.
되도록 마이너리티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유형(프랑스)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 일본과 같이 약자 혹은 소수자 일반을 이르는 의미로 마이너리티를 사용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자면, 마이너리티 개념 자체가 다양성을 품고 있으며 그 대상은 갈수록 확대될 수 있다. 광범위한 사회 구성원 누구나가 각각의 근거에 의해 마이너리티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마이너리티다, 하는 잠정적 결론에 이르게도 된다. 다소 느슨해 보이는 이 같은 결론에서 어떤 연결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까. 적대가 아닌 유대와 상생의 의지를 말이다. 나와 다른, 그러나 실은 그리 다르지 않은 타인을 동일선상의 연대적 존재로 인식하는 일. 여럿이 함께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에서 '작은 나'와 '작은 너'가 서로를 헤아리는 일.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문학을 생각한다. 타인의 감정에 기꺼이 감응하는, 타인과 교통하는 문학의 본령을. 나로부터 시작해 종내에는 너를 보는 일, 너에게로 향하는 일을. 우리가 한 편의 문학 작품을 읽고 또 쓰는 것은 바로 이를 위한 '작은 노력'일지도 모른다. '나'라는 부전한 세계에 함몰되지 않고 보다 넓고 복잡한 사회와 인간의 면면에 제대로 대응해 가려는 노력. 이마저도 아니라면 우리는 도리 없이 랍스터가 되거나, 혹은 나와 다른 누군가를 서슴없이 랍스터로 만들어버리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가장 믿음직한나는 너 되는 사랑의 용병들.
- 이연주 <사랑의 용병> 부분
랍스터가 되지 않아도 된다면
한편, 마이너리티 개념의 다양성은 일련의 위험과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 역시 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개인의 다단한 피해의식이나 허위의식이 곧 마이너리티와 결부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지……. 또한, 앞의 책에서도 지적하듯, 마이너리티를 보호하고자 하는 관련 사회운동과 정책까지 고려한다면 제도적 차원에서 마이너리티의 정의에 대한 세밀한 검토와 보완은 반드시 필요하겠다.
나는 지금 동네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마침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지팡이를 짚고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야윈 다리를 절룩이며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가까스로 지나 내 옆 둥근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카페가 대학 부근에 위치해 있고 그가 두꺼운 전공 서적을 잔뜩 꺼내 놓았으므로 대학생일 거라 짐작해 본다). 청년과 내가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신다. 나란히 앉아 책장을 넘긴다.
그러는 동안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흐르고 각양의 사람들이 오고 간다. 순간 급히 울리는 전화기를 찾던 내가 물 잔을 엎지르고 허둥지둥하자 고개를 슬몃 기울인 청년이 냅킨 몇 장을 건넨다. "아, 고맙습니다" 말하며, 누군가 스치듯 전한 온기에도 금세 마음이 열리곤 하는 나는 속으로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랍스터가 되지 않아도 될까.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는 되지 말자. 그래, 그러자. 이런 약속이야말로 '작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지켜야만 하는 최소한의 정의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