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충북 청주시 동공원에 집결한 부대원들이 숨을 죽였다. 남부군 승리사단 김흥복 부대와 송관일 부대는 1951년 5월 20일 속리산을 출발해 연일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이동했다
바다이야기무료머니 . 청주에서 10km 떨어진 가래산(청원군 낭성면 인경산)에 도착한 것은 5월 25일이었다.
당 열성자 회의
비를 흠뻑 맞은 남부군이 가래산에서 '당 열성자 회의'를 개최했다. 승리사단 정치주임 김갑제로부터 당원들의 전투 과업에 대한 보고가 있었고, 이어 비상한 결의를 표명한 토론이 벌어졌다.
김흥복 부
릴게임예시 대의 최복산은 "나는 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당과 수령을 위해 맡겨진 청주형무소 해방 임무를 죽음으로써 수행하겠다. 우리들의 굳은 결의를 총사령관 동지께 반영시키기 위해 맹세문을 채택하고, 거기에 각자의 서명을 할 것을 제의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충북도청 공격 임무를 맡은 박종섭의 결의가 있었다. 토론은 한동안 계속됐다. 먹물을 머금은 듯한 어두컴컴한 곳에
오리지널골드몽 는 빨치산의 눈과 누런 이만 보일 뿐이었다.
당 열성자 회의를 마친 후 대열의 이동이 시작됐다. 대원들은 미끄러운 논둑길에서 여러 번 넘어졌다. 속리산에서 가래산을 경유해 동공원(당산, 해발 104.5m)까지 가는 동안, 대열 중간중간에 간부들이 음밀성 보장을 위해 지도·점검을 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기침 소리도 군경과 주민에게 적발될
릴게임바다이야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마을로 올라오는 나무꾼과 나물을 뜯으러 오는 여성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마을을 통과할 때 개가 짖으면 대원 전원은 발소리를 죽였다. 대원이 기침을 하려고 하면 간부들이 수건으로 입을 막기도 했다. 대원들은 청주에 도착하기까지 5일 동안 세수를 하지 못했다. 또한 밥을 지어 먹지도 못했다. 밥을
릴게임하는법 지으려면 불을 피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생쌀을 씹어 먹어야만 했다.
5월 25일 오후 7시 15분, 가래산에서 출발했다. 5리(2km)쯤 지났을 때 길을 찾지 못해 1시간 30분이나 지체했다. 간부와 대원들은 '이러다 작전이 실패하는 것은 아닌지' 초조해했다. 결국 간부들은 작전 성공을 위해 일부 코스를 변경하고 뛰다시피 강행군을 했다.
남부군이 청주시 한가운데 있는 동공원에 도착한 것은 5월 26일 오전 1시였다. 옷은 보슬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남부군은 동공원을 지휘처로 삼고 우측에 송관일 부대를, 좌측에 김흥복 부대를 배치했다. 배치는 새벽 1시 20분까지 완료됐다.
경사 60도의 가파른 길을 뛰어내린 대원들은 주요 관공서 앞에 집결했다. 새벽 1시 45분, '두두두' 하는 기관총 소리를 신호로 유격대원들의 총공격이 시작됐다. 이른바 '청주해방작전'이었다. 기관총과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 빨치산의 만세와 함성이 뒤섞이며 청주 시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 동공원?청주시 습격사건 때 공격의 시발점인 동공원에서 본 청주시내
ⓒ 박만순
충북도청과 경찰국, 청주지방법원, 청주형무소, 청주방송국이 공격을 받았다. 관공서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날 청주해방 투쟁(청주시 습격)의 안내는 노동당 충북도당 간부들이 맡았다. 노동당 청주시당 위원장 신장식(청원군 강서면 원평리)과 강외면 쌍청리 출신의 박인섭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건이 발발한 날, 노동당 충북도당은 총사령부에 감사문을 보내기도 했다.
청주시 해방작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과 빨치산은 사면초가에 빠졌다. 인민군은 UN군의 상륙작전을 예상했지만, 그곳이 인천일 것이라고는 정확히 예상하지 못했다. 인천에 상륙한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남한 일대의 인민군과 지방 좌익들은 크게 동요했다.
결국 인민군과 비정규군인 빨치산은 백두대간을 따라 북상하며 3·8선을 넘으려 했다. 북상 대열의 최고지도자 이현상은 1950년 11월 1일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이승엽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승엽은 이현상에게 남조선인민유격대를 개편해 지리산 등지에서 싸울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11월 14일 남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가 창설됐다. 간부진은 다음과 같았다.
사령관: 이현상
정치위원: 여운철
부사령관: 차일평, 유주목
총참모장: 박종하
[승리사단] 사단장: 이진범, 정치위원: 정경, 흥복부대(200명), 관일부대(200명)
[인민여단] 여단장: 김재연, 정치위원: 김삼홍, 150명
[혁명지대] 지대장: 서홍석, 정치위원: 마태식
남조선인민유격대는 1951년 1월 초 '남부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남부군은 단양·문경 경찰서 습격, 영풍 미군 부대 기습, 죽령 동로지서 습격 등을 벌이며 영남·영북 교통을 차단했다.
남부군은 2월 6일 속리산에 도착했다. 충북 보은군 마로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일대를 해방지구로 설정하고 3개월가량 주둔했다. 그리고 1951년 5월 26일, 충북도청 소재지인 청주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청주해방작전'이었다.
남부군이 청주를 공격할 당시, 청주시의 경계 태세는 어떠했는가. 사건 당일 새벽, 충청북도 경찰국 당직 병력은 내근 5명과 외근 6명(정문·동문·서문 각 2명)으로 총 11명에 불과했다.
청주 시내에는 직할·석교·영운·남주·서문·역전·내덕 등 7개 파출소가 있었다. 각 파출소는 의례적인 경비만 섰을 뿐, 빨치산의 공격에 대비한 특별경비소 설치나 검문소 운영, 방어진지 구축 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외곽 경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청원군 낭성면 소재 소백산로에 연결된 인경산에 초소를 설치하지 않아 인민군의 북상 루트를 저지하지 못하는 과오를 범했다.
그렇다면 청주에는 왜 이렇게 경찰 병력이 부족했을까? 청천·화양리~송면, 선유동 일대 도명산·낙영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 소탕을 위해 청주·진천·괴산·보은경찰서에서 차출된 경비병력 250명이 작전지구로 출동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주력 역할을 담당한 청주경찰서는 내근 직원 약간 명만이 청사를 지키고 있었다고 전해진다(전창식, 5·26 청주피습사건 전말, <월간 충청>, 1977년 4월호).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잠시이지만, 충북의 도청 소재지인 청주시가 빨치산에 의해 점령되는 일을 겪은 것이다.
청주형무소 습격
김흥복 부대 박원길 ○구분대장은 선발대 대원 6명과 함께 청주형무소를 향해 달려갔다. 박원길은 대열의 맨 앞에서 붉은 벽돌담에 달린 문을 돌파했다. 당시 청주형무소는 신축 중이던 감방만이 외벽 없이 우뚝 서 있었다. 1950년 9월 25일, 후퇴하던 인민군이 형무소를 방화해 건물 대부분이 불타버렸기 때문이었다.
형무소를 지키던 형무관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박원길은 사방으로 도피하는 형무관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감방으로 향했다. 감방 안에서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빨치산의 습격이 있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박원길은 "동지들! 얼마나 애달픈 나날을 보내셨소. 오늘 우리 빨치산은 당신들을 구출하러 이곳을 찾았소. 어서들 나오시오"라고 외치며 감방문을 모두 부쉈다. 이내 재소자들이 뛰쳐나왔다. 그 과정에서 웃지 못할 상황도 연출됐다.
일부 형무관이 감방 안으로 들어가 재소자들이 덮던 담요로 얼굴만 덮은 채 엎드린 것이었다. 빨치산들은 형무관의 엉덩이를 차며 "동무! 나가시오"라고 했다(홍두표, <나의 여운>, 2006).
감방에 있던 재소자 142명이 옥문을 나왔다. 그러나 청주형무소 형무관이었던 홍두표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재소자는 280여 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 사형선고를 받고 상고심을 앞둔 사형수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감방을 나왔다는 증언이다. 즉, 빨치산 측이 파악한 142명의 두 배에 가까운 280명가량이 형무소를 벗어난 셈이다.
청주형무소에서 나온 이 중에는 15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던 노동당 괴산군당 선전부장 김종한도 있었다. 그는 "오늘 이 감격과 기쁨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이 몸이 해방되어, 더구나 빨치산에 참가해 원수를 무찌르고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풀 수 있을 줄이야"라며 남부군 대원들을 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빨치산 자료집 7>, 1996).
▲ 애국자 구출?청주시 습격사건 때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던 인사를 구출했다는 내용의 <빨치산자료집> 기사
ⓒ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그러나 형무소를 빠져나온 재소자들이 모두 남부군을 따라 속리산으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홍두표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 당시 청주형무소에는 정치·사상범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중공군 참전 이후 상당수가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당시 재소자 대다수는 일반수였다. 감방 생활로 체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던 이들은 빨치산 대오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결국 소수의 인원만이 남부군을 따라 속리산으로 이동해 빨치산 대오에 합류했다.
박원길은 청주에서 후퇴하면서도 공훈을 쌓았다. 좌구산에서 빨치산을 추격하던 경찰 약 100명을 상대로 교전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단 6명의 대원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박원길은 경찰의 총탄에 맞았다. 그는 "공화국 만세", "김일성 만세"를 외치며 눈을 감았다. 이후 승리사단 사령부는 총사령부에 박원길에게 국기훈장 3급 수여를 건의했다.
속리산에서의 경축대회
청주형무소 습격과 동시에 충북도청과 충북경찰국, 청주방송국도 공격을 받았다. 방송국 공격에는 김태용이 앞장섰다. 그는 방송국 정문 안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방송실이 파괴됐고, 도주하는 직원들을 향해 발포했다. 그 후에는 방송국에 불을 질렀다.
충북도청 공격은 ?구분대장 오응원이 앞장섰다. 그는 연락병과 함께 정문을 기어들어 가 현관으로 진입했다. 불이 켜진 한 사무실에서는 경찰 5~6명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연락병이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오응원은 수류탄을 던졌다.
경비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충북도청과 충청북도 경찰국은 순식간에 빨치산에 의해 점령됐다. 이 과정에서 엄지섭(여) 순경(보안과)과 오선표 순경, 도청 공무원 1명이 사망했다. 새벽 3시 30분 철수를 시작한 유격대원들은 가래산과 좌구산, 미원을 경유해 속리산으로 퇴각했다. 이 사건은 국회에서 정치 쟁점화됐고, 결국 이광 충북도지사와 정태섭 충북도경찰국장이 해임됐다.
약 1시간 30분에 불과했지만, 유격대가 도청 소재지를 공격한 사례는 한국전쟁기 빨치산 투쟁 중 유일무이한 일이었다. 이에 남부군은 1951년 6월 6일 속리산에서 '청주해방투쟁 기념 경축대회'를 열었다.
▲ 경축대회?속리산에서 열린 청주해방투쟁 경축 대회 내용이 담긴 신문 기사
ⓒ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반원형 야외무대에는 김일성·스탈린 초상화가 걸렸고, '청주해방투쟁 기념 경축대회'가 진행됐다. 주석단에 앉은 남부군 최고지도자들의 목에는 흰 목련화로 만든 둥근 화환이 걸렸다. 김흥복·송관일 부대의 경과보고와 연예대회도 이어졌다.
승리사단 정치주임 김갑제의 사회로 진행된 대회는 총사령관 명령 제2호 낭독으로 시작됐다. 축하의 대미는 축시 낭독이었다. 김명재의 축시는 "달이 별로 없는 캄캄한 야밤을 / 험한 산 깊은 숲길을 헤치며 / 뛰노는 심장의 고통과 함께 / 낮처럼 밝혀진 전등불 아래 / 반석보다 더 굳은 신념을 안고 / 청주에로, 청주에로 믿음의 용사들은 나아간다"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