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를 안은 요셉은 천사들의 현몽을 받고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길이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던 헤롯대왕의 죽음과 이제 고향에서 다시 살 수 있다는 기쁨이 요셉의 걸음을 가볍게 했다. 그런데 그가 걸음을 멈춘다. 멈춘 정도가 아니라 성경은 요셉이 "무서워"하였다고 증언한다. 기쁨은 어떻게 두려움이 되었나? 그를 둘러싼 세계 때문이다. 예수를 죽이려고 영아 학살을 벌인 헤롯의 세계에서 요셉은 생존을 위해 숨어 살아야 했다. 이집트로 도망가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는 무고한 아기들의 죽음과 유가족들의 슬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헤롯의 학살은 죄책감의 방식으로 그의 몸과 영혼을 정밀 타격했고, 상
릴게임다운로드 흔은 깊었다.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은 그 트라우마를 소환했고 요셉은 귀향을 멈춘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으나 여전한 헤롯의 세계에서 두려움에 멈춘 요셉, 그의 모습은 인간의 처지를 대변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기 예수로부터 오는 평화로 점철되지 않는다. 삶은 헤롯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에 공격을
릴게임손오공 당한다. 믿음은 안착하지 못하고 현실 앞에서 쪼그라들고 만다. 믿음이 겨자씨보다 작아지면 우리는 서로에게 오래된 냉소를 되뇌인다. "네가 현실을 몰라서 그래."?대화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초월의 씨앗"은 성장을 멈춘다. 헤롯의 판정승이다. 만약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이 헤롯의 현실에 낙담한 이들을 상담했다면 그들과 어떤 대화를 나
릴게임꽁머니 누었을까? 나는 이 책이 그에 대한 차근한 대답처럼 들렸다.?
전쟁 속에서 만든 기도 모임
이블린 언더힐은 성공회 평신도 신학자이자 영성가이다
야마토게임무료다운받기 . 이 책은 그가 신비주의 영성 연구와 기도 모임 인도와 신앙 상담에 평생을 바쳤다고 소개한다. 영성 연구가 초월을 탐구한 시간이었다면 신앙 상담은 현실을 직시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조우한 초월과 현실 사이에서 그는 기도 모임을 인도한다. 기도 모임을 인도했다는 그의 이력은, 현실이라는 허상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
릴게임바다이야기 발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기도 모임을 인도했다는 그의 이력은 참상 속에서도 참된 실재를 붙들겠다는 결단으로 읽힌다. 그는 참된 실재로부터 현실을 보려 했고, 그 결정적인 통로는 기도였다. 현실에 질끈 눈을 감고 그저 자기들만의 방언으로 치닫는 기도 말고, "삶의 상처들, 의도적으로 이루어지는 해악들, 사랑 없이 무심코 일어난 피해들 모두를 고요하고 온화하게 받아들이는"(139쪽)?기도로 그는 현실을 포용하려고 했다. 자기 중심적이고 절망적인 인간의 현실을 "뚫고 안으로 들어와 구원하고 정화하며 비옥하게 하는"(68쪽) 기도로부터 그는 절망 너머로 나아가려고 했다.
<아바 - 주님의 기 도를 통해 배우는 그리스도인의 기도>/ 이블린 언더힐 지음 / 황윤하 옮김 / 비아 펴냄 / 1만 3000원
기도는 어떻게 절망을 정화하는가
도대체 기도는 우리 내면에 어떤 작용을 일으키기에 절망조차 정화할 수 있는가? 향심 기도 운동을 시작한 토머스 키팅 신부는 인간에게 세 가지 인식 수준이 있다고 본다. 첫 번째가 일상적 인식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상적 인식 수준에서 지낸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순간이 여기에 속한다. 우리는 일상적 인식 수준에서 나와 타인을 이해하며 세상과 상황을 판단한다. 두 번째가 영적 인식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표면 너머의 영적 현실을 감각할 수 있는 인식 수준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비정형의 구름과 그것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 앞에서 어떤 경외심을 느낀다. 하늘 아래 반듯한 건물들과 달리 내가 규정할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영적 인식 수준에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세 번째가 신적 인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내 안에 계신다.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고 물이 바다를 덮은 충만한 상태인 신적 인식 수준에서 우리는 "창조되지 않은 빛"(14쪽) 아래 엎드리고 그곳으로부터 새로운 눈길을 얻는다.?
보통 기도는 일상적 인식 수준에서 드려진다. 나의 처지, 꿈, 상황을 아뢰고, 세상을 바꿔 주시기를 청하는 기도는 자연스럽다. 문제는 기도가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 기도가 생각처럼 응답되지 않을 때, 불의한 세상이 꿈쩍하지 않을 때 우리는 기도가 좌초되는 경험을 한다. 많은 이들이 이때 더 큰 간절함으로 부르짖으며 자신의 신앙을 공고히 하거나, 도무지 무력한 하나님을 떠나기로 한다. 이블린 언더힐은 기도의 중심을 여기 일상적 인식 수준에 두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구조에 주목한다. 주기도는 일상적 인식 수준에서 필요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경배로부터 시작된다. 아바, 아버지를 부르며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경배의 구도
얼마 전 설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부모님께 찾아뵙고 세배를 드렸다. 소파에 앉아 계신 부모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바닥에 가지런히 모은 뒤 이마가 땅에 닿도록?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몇 초가 지났을까? 다시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부모님의 발등이 보였다. 그 순간 얼마 전 교회에서 봉독한?성서일과 시편 99편 5절 말씀이 떠올랐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발등상은 발을 올려놓는 상을 의미한다. 경배는 그의 발등상 앞에 엎드려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인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의도적인 행위라기보다 하나님을 인식한 인간의 본능적 반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지는 물고기가 잡히는 현장에서 만선의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에 차올라 예수님 앞에 엎드리지?않았던가.
세배를 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웃으며 덕담을 건네셨고 그 말은 고요하게 귓가에 도달했다. 나는 세배의 구도가 참 좋다고 느꼈다. 두 분은 나의 부모이고 나는 그의 자녀다. 그 구도를 지탱하고 있는 건?내가 살아온 세월만큼의 서사였다. 가장 연약한 인간을 위해 자기 생명을 성실하게 소진했던 시간이 부모와 자녀의 구도를 빚어 냈고, 세배를 하는 동안 그 관계성이 명징하게 나타났다.?
이 책의 서두에 등장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 '아기 예수의 기도'도 이런 구조를 잘 보여 준다. 이 그림의 부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인데 누가복음 2장 40절이 토대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림 속 아기 예수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기도의 대가"로 등장한다.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손을 모은 아기의 자세는 완전하고, 그를 향해 위로부터 빛이 쏟아진다.
아기 예수가 기도하는 침상 주위에는 네 천사가 무릎을 꿇고 그의 발등상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눈여겨 보게 되는 대목은 천사들 뒤에 있는 마리아와 요셉이다. 그림 속 요셉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은 채 아기 예수를 향해 있다. 경배하는 그의 얼굴은 더없이 차분하고 평온해 보인다. 헤롯 아켈라오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이 두려워 아기 예수를 안고 나사렛에 숨었던 요셉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악한 왕이 통치하는 세상은 여전한데 요셉은 어디서 평안을 찾은 것일까? 그림은 말한다. 아기 예수로부터라고. 그는 아기 예수 안에서 "완전한 균형과 기쁨"을 목도했을 뿐만 아니라, 아기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자녀로서 관계 맺는 자리로"?들어간다(14쪽). 그를 경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의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셨고(71쪽) 그의 눈은 맑아졌다. 세상의 "모든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인정"하게 된 것은(93쪽)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동안 일어난 은총이었다.?
윌리엄 블레이크, '아기 예수의 기도', 1805년경, 31.6 x 34cm, 수채화 드로잉.
기도가 이끄는 곳 자기를 잊은 사랑의 자리
이 그림에서 기억해야 할 한 가지?더 있다면, 경배의 대상인 아기 예수가 자란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마침내 사람들 앞에서 세례를 받으며 하나님의 아들로 공적 생활을 시작하신다. 그분은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시며 병든 자를 고치신다. 여기까지는 좋다. 사람들은 그분을 더욱 경배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모두가 혐오하는 저 십자가 사형틀을 향해 나아가신다. 불의의 세계에 대항하는 방식이 아니라 무고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신다.
이블린 언더힐은 주님의 기도가 우리를 이끄는 곳이 십자가, 자기를 잊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자리라고 말한다. "조국을 짓밟은 침략자를 용서하는 애국자 왕처럼, 동생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고 십자가 앞에 칼을 내려놓는 자비로운 기사처럼, 딸을 배신한 자를 용서하는 부모처럼, 평생의 과업을 망쳐버린 이들을 용서하는 헌신적인 개혁가처럼,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자를 용서하는 평화주의자처럼"(139쪽), 기도는 자기를 잊은 사랑의 자리로 우리를 이끈다. 당신은 이 부름에 응답하여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는가? 자기를 부인하고 기도가 이끄는 저 무력의 자리에 매달릴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답을 할 수가 없다. 혹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한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현실 앞에서 두려워 입장을 바꿀지도 모른다. 인간이 스스로 나아갈 수 없는 자리, 실패의 흔적이 자자한 자리, 이블린 언더힐이 평생을 바친 기도 모임은 아마도 이 지점에서 계속되지 않았을까. 마침 사순절이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절기, 주기도문을 가만히 읊조려 본다. 그 오래된 기도의 길을 따라 경배로부터 다시 시작해 본다.
장재령 / 목사. 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를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