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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반전의 세계사’] 과거사 규정짓는 역사용어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 나치는 유대인을 추방해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을 ‘재정착’이라 부르는 등 추상적 완곡어법을 써서 극악한 범죄를 호도했다. [중앙포토]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 과거는 지나간 세월일 뿐이다. 이미 일어난스카이라이프 주식
일에 이름을 붙일 때 비로소 그 일은 역사가 된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지만, 어떤 이름을 붙이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거듭해서 바뀐다.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로서의 역사가 계속 바뀌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를 바꾸는 것은 하느님도 할 수 없지만, 역사가는 할 수 있다”는 새뮤얼 버틀러의 말을 칭찬으로 받꺽은선챠트
아들이는 역사가는 별로 없을 것이다. 자신은 과거의 사실만을 밝힐 뿐이라는 공언 뒤에 숨은 역사가의 직업적 비밀을 들켜버렸다는 민망함이 대개는 더 크지 않을까 한다.
물론 사실을 정확히 규명하는 것은 역사학의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며, 사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진지한 역사가치고, 사실에만 머무르는 역사가는 별대륙제관 주식
로 없다. 역사 논쟁은 사실의 진위를 가리는 차원을 넘어서 어떤 이름으로 의미 부여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하느님도 못 바꾸는 과거, 역사가는 가능” 역사가들이 똑같은 사실을 공유한다고 해서 논쟁이 사라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찌 보면 본격적인 논쟁은 사실을 밝힌 후부터다. 역사가들이 공유하는 사실위너스클럽
적 과거에 어떤 이름을 붙일까 하는 역사적 명명법 논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광주사태’와 ‘5·18 민주화 운동’ 사이의 간격은 바다만큼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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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진주만에 정박한 미국 해군 전함이 일본군 공습으로 불타고 있다. [사진 내셔널 아카이브즈]







세계사 논쟁도 다르지 않다. 예컨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역사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의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에서 벌어진 전쟁을 어떻게 이름 붙이는가에 따라 크게 출렁인다. 아마도 식민지를 겪었거나 해방 직후 태어나서 자란 노년 세대들은 ‘대동아전쟁’ 혹은 ‘태평양전쟁’이라는 이름에 익숙할 것이다.

일제의 선전 문구인 ‘대동아전쟁’에는 일본이 인간 이하인 ‘귀축영미(鬼畜英美)’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 아시아인의 단합된 투쟁을 이끈다는 함의가 있다. 지리적 명칭인 ‘태평양전쟁’은 이보다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태평양을 둘러싼 미일전쟁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중국이나 동남아에 대한 일본 제국의 침공을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대동아전쟁’이나 ‘태평양전쟁’ 대신 ‘15년 전쟁’을 들고나온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1931년부터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1945년까지의 15년을 전쟁 기간으로 설정함으로써, 미일전쟁뿐 아니라 난징학살,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대기근 등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폭력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한편, 일본의 강성 민족주의자들은 ‘백년전쟁’을 선호하기도 한다.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흑선이 일본의 문호를 강제 개방한 1853년 이래 100년 이상 일본이 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는 의미이다. 심지어는 영불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를 소환하여 일본의 비장한 투쟁을 그리기도 한다. ‘백년전쟁론’은 일본의 항복이 권토중래를 도모하기 위한 일시적 후퇴라고 본다. 전쟁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그러나 일본의 백년전쟁론도 나치의 ‘십자군 전쟁론’에 비하면 차라리 애교스럽다. 나치 선전 매체들은 이미 1940년 노르웨이의 부동항 나르비크 전투의 승리를 그릴 때부터 십자군의 메타포를 사용했다. 노르웨이의 혹한과 험준한 산악 지역에서 분투하는 독일군 병사에게는 중세 십자군의 갑옷과 방패, 십자가 등의 이미지를 덧입혔다. 나치는 ‘정의의 십자군’이 됐다.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침공하면서부터 나치의 십자군 코스프레는 점입가경이다. 나치는 독일인이야말로 러시아 볼셰비즘의 야만에 맞서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지키는 수호 민족이라고 떠벌렸다. 나치 독일은 최전선에서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지키는 선봉장이 되었다. 나치가 러시아 침공을 ‘바르바로사’ 작전이라 이름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이라는 뜻의 별칭 바르바로사로 잘 알려졌다. 그는 3차 십자군 원정 당시 가장 많은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다가 1190년 아나톨리아에서 사망한 인물이다. 그를 숭배한 히틀러는 소련 침공 당시 작전명을 ‘바르바로사’라고 붙였다. 이슬람을 격퇴하고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중세 십자군과 러시아 공산주의를 무찌르고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지키는 반공 십자군의 이미지를 교차시킨 것이다.
1999년 7월 유럽의 기독교 평화 운동가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십자군이 저지른 폭력과 야만적 만행에 책임을 느끼고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와 화해를 청한다”라고 선언한 후 십자군 루트를 따라 사죄 순례에 나섰다. 피로 얼룩진 중세 십자군의 역사에 대한 참회였다. 동유럽에서 나치는 십자군의 이름으로 홀로코스트의 악행을 저질렀다. 나치의 용의주도하고 교활한 명명법은 유대인 절멸 정책에서 세세한 데까지 미쳤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잘 간파했듯이 나치의 추상적인 완곡어법은 자신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를 호도하고, 감추기 위해 잘 계산된 방책이었다.
1942년 1월 나치 보안부가 반제 회의에서 채택한 ‘최종 해결책’은 홀로코스트를 은폐하는 용어였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최종 해결책’이라는 용어에서 그토록 끔찍한 죽음의 냄새를 맡기는 어려웠다. 최종 해결책의 실행 과정에서 폴란드 곳곳에 만든 강제수용소의 일상은 그처럼 교묘하고 아리송한 완곡어법으로 가득 찼다.
나치는 유럽 각지의 유대인을 추방하여 죽음의 수용소로 강제 이주하는 과정을 ‘재정착’이라고 불렀다. 주민을 새로운 땅으로 이주시킨다는 뜻의 이 용어에서 홀로코스트와 같은 끔찍한 폭력을 연상하기는 쉽지 않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나치에 대한 저항 투쟁의 상징이었던 폴란드와 동독의 공산당 정권이 나치와 같은 용어를 사용한 것은 당혹스럽다. 강제 이주자의 시선이 아니라 권력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으로 편입된 동부 영토에서 폴란드인들의 강제 소개와 동프로이센과 주데텐 등에서 독일계 주민의 추방 과정을 폴란드와 동독의 공산 정권은 모두 ‘재정착’이라고 규정했다. 어느 날 갑자기 상부의 결정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던 강제 이주자들의 고통이나 그 결정 뒤에 숨어 있는 폭력성은 ‘재정착’이라는 중립적 용어 뒤에 숨어버린 것이다.
유럽 각지에서 강제 이송되어 온 유대인 및 기타 수감자들이 독일어·폴란드어·러시아어·이디시어·그리스어·프랑스어·세르비아어 등 온갖 언어를 구사하는 아우슈비츠는 그야말로 언어의 바벨탑이었다. 서로 소통이 어려운 이들이 가진 가장 공통적인 언어는 나치 가해자들이 던져 준 기이한 수용소의 언어였다.
독일어로 무슬림을 뜻하는 ‘무젤만’은 노동력을 잃고 곧 가스실에서 사라져 갈 수감자를 뜻했다. 주로 고참 수감자들이 쓰는 은어였다. 말하자면 아직 살아있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존재를 뜻하는데, 수감자들 사이에 이 용어가 큰 저항 없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나치의 권력이 수용소의 일상에도 깊이 침투했다는 증거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교묘한 용어로 가해자의 죄책감 지워 더 기이한 것은 ‘캠프 캐나다’의 존재이다. 캠프 캐나다는 강제 이송되어 온 유대인 수감자들의 소유물을 압수해서 저장하는 나치의 불법적 약탈 창고였다. 2023년 개봉된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수용소장인 루돌프 회스의 부인 헤트비히는 유대인 약탈물을 보관한 곳에서 모피 코트, 보석, 고급 식기 등을 쇼핑 중독자처럼 탐닉한다. 그러나 이 창고가 ‘캠프 캐나다’라고 불리는 순간 홀로코스트의 범죄성은 증발하고 닿을 수 없는 희망의 장소가 된다.
나치의 아리송한 완곡어법은 강제수용소의 가해자에게는 죄책감을 지워버리는 동시에 그 범죄에 일조하도록 강요받은 희생자에게는 공범성을 잊게 하는 놀라운 최면 효과가 있었다. 사소한 것 같은 이 작은 언어적 장치들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떠받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법도 그렇다. 나는 일본군 ‘성노예’라는 용어가 일제의 ‘만행’을 부각하기 위해 피해자들의 행위 주체성을 몰각하고, 사물화한다는 점에서 반대한다. 그러나 ‘위안부’가 나치의 완곡어법처럼 가해자들의 부정론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점에선 유보적이다. 당장 뾰족한 대안도 없다. 역사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역시 어렵다.














임지현 서강대 석좌교수. 서강대에서 서양사 전공. 대표 저서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2021), 『기억 전쟁』(2019), 『대중 독재』(2004), 『우리 안의 파시즘』(공저 199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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