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보이스피싱 피해 발생 시 금융사에 책임이 없어도 피해액을 배상하게 하는 ‘무과실 배상책임제’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은행권은 수사권도 없는 금융사에만 배상책임을 지우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법안이 통과될 경우 연간 약 2800억 원의 부담이 발생해 결국 금융소비자의 수수료 인상이나 금리 불이익으로 전가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10일 5대 금융지주 회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피싱 범죄에 대한 금융권 책임성 강화와 피해자의 실효성 있는 구제를 위한 무과실 책임 도입을 적극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 위원장이 언급한 ‘보이스피싱 무과실 배상책임’은 금융권이 가장 예의주시하고 있는 사안 중 하나다. 보이스피싱 피해가 발생했을 때 금융사의 고의나 과실 여부와 관계 없이 일정 금액을 피해자에게 배상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안’은 더불어민주당 강준현?조인철 의원이 각각 발의한 뒤 아직 국회 계류 중이다. 다만 금융당국이 제도 도입에 힘을 싣고 있는 만큼 하반기 국회에서도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안 논의가 재개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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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보이스피싱 등 전기통신 금융 사기 피해액은 4338억원으로 전년(3801억원) 대비 14.1% 증가했다. 이는 최근 5년(2020~2025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이에 당국은 개인의 주의만으로는 진화하는 금융사기를 막기 어렵다고 보고, 금융사와 같은 보이스피싱 예방에 책임있는 주체가 피해액의 일부를 배상하도록 해 소비자 보호와 범죄예방 노력을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은행권은 피해액 ‘전액 배상’이 현실화될 가능성에 대비해 보이스피싱 예방 총력전에 나서는 모습이다. 보이스피싱 보상보험이 대표적이다. 보이스피싱 보상보험은 보이스피싱 및 메신저피싱 등으로 피해를 입었을 경우 금전적 보상을 해주는 상품이다. 최대 1000만원 한도 내에서 통상적으로 피해액의 70%를 보상하는 구조다.
보이스피싱 무과실 배상제도가 시행되면 금융사는 과실 여부와 관계없이 최대 5000만원 범위에서 피해를 배상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배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보험 가입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함께 은행권은 인공지능(AI) 기술과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 고도화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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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자체 예방책에도 법률로 ‘무과실 책임‘이 명시될 경우 은행권이 짊어져야 할 재정적 부담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금융당국 추산에 따르면 배상 한도를 최대 5000만원으로 설정할 경우 금융권의 연간 배상액은 약 2800억원에 달한다.
업계에서는 스팸문자나 대포폰 등 범죄의 입구가 되는 통신사 등의 책임은 쏙 빠진 채 금융사만 ‘독박 배상‘을 지는 구조적 불균형에 대한 반발도 거세다. 은행권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예방 책임은 통신사에도 있는데 수사기관도 아닌 금융사에만 책임을 묻는 것 자체가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조직적으로 이뤄지는 보이스피싱을 근절해야 하는데 무과실 배상책임을 해버리면 이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도 생겨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보이스피싱 무과실 배상책임제는 피해자 보호라는 입법 목적은 충분히 설득력 있지만, 금융사에 과실이 없는데도 일괄적으로 전액 책임을 지우는 방식은 과실책임 원칙·형평성 측면에서 법리적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실제로는 배상비용이 수수료, 금리, 서비스 축소 같은 형태로 소비자에게 전가될 가능성도 있어 전면적 무과실 책임보다는 금융사·통신사·정부가 책임과 기금을 분담하고, 금융사의 면책 기준과 피해자 중과실 판단을 정교하게 설계하는 혼합형 제도가 타당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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