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제의 칼날에 짓밟히고 일제의 압제가 더 가혹해지자 우리 민족의 허탈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1년여 전인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볼셰비키 폭력 혁명으로 공산주의 소련이 탄생한 것입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 먹고 잘산다는 꿈같은 이념이 현실의 대국으로 나타나자 전 세계는 공산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혔습니다.
절망에 빠진 한반도 지식인들에게 그 환상은 더 강렬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미국·영국 같은 서방은 상상 속 세계였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이웃 나라였습니다. 러시아는 불과 10여 년 전(1904년) 러일 전쟁으로 일본과 싸운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를 일제에서 해방시켜 줄 힘은 서방도, 쇠락한 중국도 아닌 신흥 공산 국가 소련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소련은 전 세계 공산화를 위해 각국의 공산주의 조직에 막대한 자금을 댔습니다. 3·1 운동 다음 날인 1919년 3월 2일 소련의 레닌은 코민테른을 창설합니다. 코민테른은 전 세계 공산화를 목표로 각국 공산당을 지도하는 중앙집권적 통제 기구입니다. 1950년대 작성된 미국 CIA 보고서는 1930~31년 코민테른 극동국(중국·조선·일본 등의 공산당 관할)이 분배한 돈만 122만 파운드(현재 화폐 가치로 수천억 원 추산)라고 분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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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자금 지원을 가장 먼저 받은 한반도 공산주의자는 이동휘였습니다. 그는 1918년 6월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만든 한국 공산주의의 시조였습니다. 1919년 8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된 이동휘는 1921년 1월 독립운동가 일부를 모아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편했습니다. 고려공산당의 청년동맹 책임비서가 21세 박헌영이었습니다. 이동휘는 1921년 7월 14일 레닌을 55분간 면담하고 조선 공산화를 위한 자금 지원을 약속받았습니다.(1989.10.21.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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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있는 공산당의 수령 이동휘 씨는 러시아 정부 수령 레닌 씨의 신용을 이용해 제3국제공산당(코민테른)에서 12만 루블의 선전비를 얻어 가지고 (후략)” (1923.10.10.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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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이 준 수십만 루블(현재 화폐 가치로 수백억 원 추산)의 거액(RGASPI, 러시아 국립 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 기록)을 놓고 암투가 벌어져 1922년 자금책 김립이 암살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집니다. 이렇게 천문학적 돈을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 대준 소련의 최종 목표는 조선 독립이 아닌 조선 공산화였습니다.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의 독립운동 주도권을 장악해 갔습니다.
“공산당이 지하에서 이뤄지는 항일운동을 지휘하면서 한국인들 사이에서 공산당의 위상이 높아졌으며, 민족주의적 성향의 비공산주의자들도 공산당이 주도하는 항일운동에 적극 협조하였다.(중략)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는 동안, 좌익의 힘과 권위는 지하 항일운동을 이끈 공산당의 리더십에 힘입어 .차 성장하였다.” <미군정기 주한 미 군사>(미 육군 24군단 정보참모부 군사실, 1945)
소련의 돈으로도 부족했는지 초기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방법으로도 돈을 조달했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아편과 위조지폐였습니다.
“모스크바에 있는 공산당들은 생활이 극히 곤난함으로 조선은행권 수십만 원을 위조하여 치타를 거쳐 하얼빈으로 보낸 일이 발각돼 하얼빈에서 크게 경계 중이라는 전보가 대련에 도착했다.” (1922.2.18. 동아일보)
“만주와 노령, 상해 등 각 지부에서 공산당원들이 모여 토지를 개척하고 거기에 아편을 심어 그것을 봉천, 북경, 상해 등지에 밀수출하여 그 수입된 돈으로 당의 유지비를 삼으며 정치운동과 사회운동 자금을 조달하는데 경지 면적이 수십만 평에 이른다.” (1924.11.24.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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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성검증
1946년 조선공산당의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남로당 이중업이 북한에서 대량의 아편을 반입해 싱가포르와 상하이까지 밀수출하며 천문학적 공작금을 주무른 것(1949.4 10.동아일보)은 모두 뿌리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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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먼저 뿌려진 공산주의의 씨앗을 한반도에 심은 인물이 박헌영입니다. 경성고보를 다니다 중국에 건너가 공산주의자가 된 그는 1921년 이동휘의 고려공산당에서 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됐습니다. 1922년 3월 25일 국내에 공산당을 조직하려고 잠입하다 신의주에서 체포돼 1년 6개월 복역한 뒤 1924년 1월 20일 다시 경성에 들어와 공산당 설립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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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4월 17일 황금정(현 을지로1가)의 중국요리집 아서원에서 비밀 회동이 열렸습니다. 공산조직 화요회의 박헌영, 김재봉, 윤병덕, 북풍회의 김약수(1949년 국회부의장 재직 중 국회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됐다 월북) 등이 모였습니다. 일본 경찰의 촉각이 온통 경성에서 개최된 전조선 기자대회로 향해 있는 와중이었습니다. 이날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이 조직됐습니다. 한반도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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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인 4월 18일에는 서울 훈정동 4번지 박헌영의 집에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조선공산당 산하조직 ‘고려공산청년회’를 만듭니다. 25세 박헌영이 조선 공산주의 실권자가 된 것입니다. 당시 일본이 가장 적대시한 것이 동북아 패권의 경쟁자로 떠오른 공산주의 소련이었습니다. 일본은 본토와 조선에 공산주의가 침투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공산주의 조직이 쥐도 새도 모르게 조선에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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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은밀한 움직임은 불과 일곱 달 뒤 엉뚱한 곳에서 꼬리가 밟힙니다. 11월 22일 신의주의 요릿집에서 다툼이 벌어져 일본 경찰관이 청년들에게 폭행을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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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고려공산청년회가 중국 상하이로 보내는 비밀문서가 한 청년의 집에서 발견됩니다. 이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존재가 드러났고 전국에 검거령이 내려져 101명이 체포됐습니다.
“종로서에 검거된 사회주의자 림원근, 박헌영, 유진희 등의 사건은 조선 초유의 공산당 비밀결사 사건으로(중략) 시내 재동 화요회와 시내 관수동 신흥청년동맹을 중심으로 로국(러시아)에 있는 공산당과 비밀히 연락을 취하여 조선 내의 주의 사상을 고취시키고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전 조선 내에 공산주의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조선 천지를 진동케 하려던 계획이었다.”(1925.12.2. 조선일보)
전 조선을 뒤흔든 사건이었습니다. 1927년 9월 13일자 조선일보는 ‘만인 주시 중에 일대 사극 개막, 금일 조선공산당 공판’이라는 제목으로 한 면 전체를 털어 박헌영,김약수,조봉암 등 주요 피고인들의 사진과 혐의를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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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경성에서 전조선기자대회가 열렸을 때 4월 17일 황금정 중국요리。 아서원에서 각 사회주의 단체 영수를 망라해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이튿날인 18일에는 시내 훈정동 박헌영의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여 신의주를 연락, 중계 장소로 삼아 상해를 경유하여 모스크바에 있는 제3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지휘를 받아 자금의 지급과 기타 일체의 지휘를 받고 미래의 사회주의 혁명을 기도했다.” (1935.3.15. 조선일보 창간 15주년 특집기사 ‘대사건으로 본 15년’)
재판 받는 박헌영의 일거수 일투족이 대서특필됐습니다. 박헌영은 출정 거부, 식음 전폐 등으로 법정 투쟁을 벌이다 ‘의식 불명료’ 상태에 빠지기도 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급기야는 그가 발광 상태라는 기사까지 실렸습니다(1927.11.16. 동아일보)
“박헌영이 발광을 시작한 지 두 달째가 되었다. 하도 광기가 심해 독방에 두었으나 갈수록 태산이었다. 대변을 보고는 손에 쥐어 벽에 바르고 간수가 밥을 갖다 주면 밥은 그대로 두고 변을 먹기까지 하였다.” (남로당 지하총책 출신 박갑동 저 <박헌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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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법원은 그의 보석을 허가합니다. 출소한 그는 어머니와 처 주세죽도 못 알아보고 사람만 보면 무서워 달아났다고 합니다.(1927.11.24. 동아일보) 유명한 정신병 의사 김탁원 박사도 “병이 원체 악성인 데다 신체가 극도로 쇠약해 낫는다 해도 시일이 상당히 걸리겠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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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헌영의 정신병자 행세는 놀랍게도 모두 가짜였습니다. 치료가 오래 걸리겠다던 그는 입원한지 불과 사흘 만에 퇴원해 버렸습니다. 박헌영의 남로당 직계인 박갑동은 저서 <박헌영>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의 치밀한 능청이 계획대로 적중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어수룩했던지 박헌영의 광인 행세가 성공한 셈이 됐다.”
1년 후 박헌영은 소련으로 탈출합니다.(1928.11.15. 조선일보 ‘조선공산당 박헌영 탈주’)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고 코민테른에서 활동하며 김형선 등에게 조선공산당 재건 지령을 내려 국내로 잠입시켰습니다. 그러다 1932년 7월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검거돼 국내로 압송됐고(1933.8.6 조선일보) 1934년 12월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습니다. 1939년 출소한 뒤 김삼룡,이관술 등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지하조직 ‘경성 콤그룹’을 결성했습니다. 이들은 장사꾼, 노동자 행세를 하며 전국에 흩어져 독서서클, 노동자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겉으로는 창씨개명, 징용, 공출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지만 궁극적 목표는 혁명과 공산주의 국가 건설이었습니다. 같은 민족이라도 민족진영, 우익은 그들에게 결국은 타도의 대상이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고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1942년 12월경 경성 콤그룹은 해체됐습니다. 박헌영은 검거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전남 광주로 피신해 8.15 해방 전까지 광주시 백운동 215번지 연와벽돌공장에서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벽돌을 굽고 나르는 인부 행세를 하며 살았습니다.
해방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서울 종로 네거리 등 시내 곳곳에는 “박헌영 동지여 어서 출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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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박 동지를 기다린다”라는 벽보가 나붙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일이었습니다. 8월 19일 금의환향한 박헌영은 8월 20일 자신이 머무르던 명륜동 김해균의 집에서 콤그룹과 화요회 중심인물을 모아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만들고, 9월 11일 조선공산당을 재건합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20년만에 화려하게 부활한 것입니다. 닷새 전인 9월 6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창건까지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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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분위기는 이미 남한이 ‘조선인민공화국’이 된 것 같았습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받은 조선공산당 멤버들은 대중의 동정과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새롭고 신비로운 이념 ‘공산주의’는 지식인들을 매혹시켰고, 평등하게 땅도 나눠준다는 달콤한 선전은 농경사회인 조선의 민중에 쉽게 파고들었습니다.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협조로 만들어진 ‘건준’을 통해 전국 행정조직을 장악했고,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막대한 재산까지 쓸어 담았습니다. 이들이 접수해서 당사로 쓴 당대 최고의 건물 근택빌딩에는 새 권력에 줄을 대보려는 행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조선공산당 전성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화양연화는 길지는 못했습니다. 이듬해인 1946년 같은 근택빌딩에 있던 조선공산당 기관지(해방일보) 인쇄소 ‘조선정판사’를 통해 천문학적 액수의 위조지폐를 찍은 사건이 적발돼 박헌영은 월북하는 신세가 됐고, 민심은 삽시간에 차갑게 식었습니다. 조선 공산주의의 종가를 자부하던 조선공산당은 같은 해 11월 김일성의 북로당에도 밀리는 남로당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남로당원들은 1946년 대구10월사건, 1948년 제주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을 일으키고, 그때마다 박헌영이 선포했던 ‘조선인민공화국’을 외쳤지만, 그 ‘인공’마저도 어느새 1948년 9월 김일성이 수립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1953년 김일성의 잔혹한 남로당계 숙청으로 조선공산당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1925년 그들이 한반도에 뿌려놓은 공산주의와 이념 갈등의 씨앗은 제주4·3사건, 여수순천사건 등 현대사의 비극과 6·25 전쟁을 거쳐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민족의 분단과 우리 사회의 비극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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