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2월, 뉴욕주 로체스터. 스물네 살 코닥 엔지니어 스티브 새슨이 8파운드짜리 상자를 들고 임원실에 들어갔다. 상자는 필름 없이 사진을 찍는 기계였다. 임원들은 이에 대해 "멋진데. 근데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라고 반응했다.
당시 코닥은 전 세계 필름시장을 석권했다. 미국에서는 필름 시장의 90%, 카메라 시장의 85%를 .유하고 있었다. 롤?하나가 팔릴 때마다 필름 값, 인화 값, 화학약품 값이 전부 코닥으로 들어왔다. 새슨이 들고 온 상자는 이 생태계 전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물건이었다.
임원들은 무능하지 않았다. 계산은 정확했다. 그 상자 관련 사업을 키우면, 자신들이 세운 사업을 닫아야 했다. 발명하는 능력과,?그 발명 때문에 무너질 과거를 스스로 버리는 능력은 서로 다른 능력이다. 코닥은 첫 번째 능력은 갖추고 있었다. 두 번째 능력은 없었다.
이는 카메라 회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랜 안정기를 지나 고속 성장으로 도약해야 하는 조직이면 어디서나 반복된다. 안정기를 지켜온 임원일수록 도약을 가장 늦게 받아들인다. 게을러서가 아니다. 그들의 전문성, 인맥, 조직 내 위치, 존재 이유 전부가 지금 지키고 있는 그 시스템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변화하라는 요구는 그들에게 능력 부족을 지적하는 말이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신호로 들린다.
인간은 생존 위협 앞에서 논리가 아니라 본능으로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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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회의실에서는 언제나 "조금 더 검토하자" "관련 임원 의견도 들어보자" "조직을 조금 더 정비하고 가자" "조금 더 좋은 타이밍을 기다리자" 등의 순서로 의견이 제시된다.
이 같은 의견은 모두 합리적이다. 그런데 네 문장을 거치면,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간다.
코닥은 이 문장들을 30년 가까이 반복했다. 하버드의 한 연구는 2001년 코닥이 디지털카메라 한 대를 팔 때마다 60달러씩 손해를 봤다고 추산했다. 2011년 필름 사업은 3400만달러 흑자를 냈고 디지털카메라 사업은 3억4900만달러 적자를 냈다. 회사는 이익을 내는 과거와 손해를 보는 미래 사이에서, 임원들은 그들의 삶과 이익을 지탱한 과거 편을 들었다.
같은 시기 태평양 건너 일본 후지필름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2000년 필름은 후지필름 매출의 60%, 이익의 70%를 차지했다. 10년 안에 이 사업이 사라진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회사 안에서 가장 힘 있는 자리도 여전히 필름 사업부 사람이었다. 본인이 맡은 사업부의 생명이 끝나가고 있다는 걸, 그들 역시 가장 늦게 인정했다.
두 회사는 같은 위기를 같은 시.에 맞닥뜨렸다.
그러나?2003년 후지필름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고모리 시게타카는 다르게 움직였다. 그는 임원들을 설득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2004년 '비전75'라는 6년짜리 시한을 못 박았다. 필름 공장을 닫고, 5000명 넘는 인력을 재배치하고, 비용 5억달러를 줄이는 데 걸리는 시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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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보가 아니라 마감이었다. 무기한이 아니라 6년이었다.
2012년 코닥은 67억5000만달러의 부채를 안고 파산했다. 같은 해 후지필름은 210억달러 매출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기술 격차가 아니었다. 둘 다 디지털을 알았고, 둘 다 연구개발에 수십억달러를 썼다. 코닥은 2005년 미국 디지털카메라 。유율 1위이기도 했다. 갈린 건 기술이 아니라, 임원에게 준 시간의 형태였다.
합의는 전원이 동의할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이다. 끝나는 시.이 없다. 누군가 한 명만 계속 반대해도 무한히 늘어난다.
모래시계는 다르다. 시간이 정해져 있다. 그 안에서 방향을 바꾸는 사람과, 바꾸지 않은 채로 시간이 다 되는 걸 지켜보는 사람이 갈린다. 결과는 냉정하다. 하지만 적어도 정직하다.
CEO의 일은 모든 임원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모래시계를 세우고, 그 시계가 다 돌기 전에 방향을 바꾼 사람과 바꾸지 않은 사람을 가려내는 일이다. 설득은 상대의 확신을 목표로 삼는다. 모래시계는 상대의 확신과 무관하게, 시간을 목표로 한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가 남는다. 당신의 조직에는 지금, 돌고 있는 모래시계가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모두가 합의하고, 미래의 방향에 대해 동의할 날을 낙관적으로 기다리고 있는가. 어쩌면 모래시계는 애초에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데이비드김 테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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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맞닥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