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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전 대구 중구 남산동 인쇄골목에 자리 잡은 인쇄소의 문이 닫혀 있다. 외부에서 보더라도 녹슨 셔터가 방치되는 등 영업을 포기한 지 오래된 느낌이 든다. 김명규 기자


11일 오전 10시 대구 중구 남산동 인쇄골목에 들어서자, 공기부터 다르게 느껴졌다. 연말이면 달력과 다이어리 주문으로 쉴새 없이 돌아가던 인쇄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인쇄소 일부는 아직까지 셔터도 올리지 않은 채 문이 닫혀 있었다. 잉크기름 냄새와 인쇄기 진동이 골목 전체를 흔들고 '대한민국 달력 70%가 대구에서 바다이야기 나왔다'던 1980~90년대의 영광은 빛바랜 잉크 자국처럼 희미해졌다.
한때 전국 인쇄업의 심장이었던 이 골목이 이렇게 빠르게 스러진 데는 이유가 있다. 누구나 PC나 스마트폰으로 디자인을 하고, AI가 색상을 추천하고 레이아웃을 잡아주는 세상이 된 것이다. 가족 사진을 넣은 새해 달력을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SNS를 통해 자랑하는 시대 게임몰 가 됐다. 소비자들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명함·달력·전단을 직접 디자인해 바로 주문하고, 인쇄물은 택배로 간편히 받아본다. 이른바 '웹 투 프린트(Web-to-Print)' 시장의 확장은 인쇄업계에 치명적이었고, 특히 소규모 인쇄소를 먼저 무너뜨렸다.
남산동 인쇄골목에서 20년 넘게 일했다는 50대 직원 김정목씨는 "달력 주문이 지난해보다 릴게임뜻 30%나 줄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 매장을 찾아오는 손님은 하루에 두세 명도 안 돼요. 대부분 명함과 같은 작은 주문인데, 상당수 소비자들은 온라인으로 출력을 맡겨버립니다. AI로 디자인하고 클릭 한 번하면 집으로 배송까지 되니까요."

인쇄골목의 형편은 수치로 보면 더욱 선명하다. 1980~90년대 이곳에 바다이야기하는법 는 2천 곳에 가까운 인쇄소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골목 일대를 걸어보면 제본, 제판, 출력업체가 이어져 있다. 빛바랜 간판들이 "대한민국 달력의 70~80%가 대구에서 생산됐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2010년대 초반 이곳의 인쇄소는 1천 곳으로 줄었고, 현재 운영 중인 곳은 400여 곳 남짓이다. 그마저도 간판만 걸 바다이야기디시 어둔 채 사실상 멈춰 선 곳을 제외하면 실제로 돌아가는 인쇄소는 더 적다는 게 인쇄골목 사람들의 말이다.




남산동 인쇄골목에 자리한 경성기획인쇄사의 이재화 대표가 홀로 일하고 있다. 김명규 기자


인쇄골목 곳곳을 살피던 중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드문드문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는 46년째 인쇄기를 돌리고 있는 78세의 장인, 이재화 경성기획인쇄사 대표가 있었다. 그는 1979년부터 이 골목에서 일했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옛날엔 직원이 열 명이 넘었어. 연말이면 밤새 인쇄기를 돌렸지." 그는 손때 묻은 인쇄장비를 손바닥으로 닦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10년 전에도 서너 명은 있었는데… 다 내보냈어. 3년 전까지는 디자이너 직원 한 명이라도 뒀는데, 이제는 혼자야."
왜 혼자 남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혼자 하면 수지타산이 맞지만, 직원을 두면 쉽지 않아." 다행히 그는 아직 대구·경북뿐 아니라, 수도권에도 거래처가 있어 폐업을 미루고 있다고 했다. "이 골목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오래된 거래처 덕분에 겨우 버티는 거지. 신규 주문 만으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어. 그래도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좋아. 그 소리만 들으면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으니까."
이곳은 6·25전쟁으로 서울의 인쇄소들이 대구로 피난을 내려오면서 형성된 뒤 산업화 시기와 1980~90년대 경제 성장기를 거치면서 각 시대의 흐름을 인쇄물에 찍어낸 도시의 기억 그 자체다. 이런 배경은 이 대표의 자부심과 맞닿아 있다.

앞서 대구는 고려시대부터 전국적인 인쇄문화의 거점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초조대장경이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된 뒤 사찰을 중심으로 인쇄가 이뤄졌고, 조선시대에는 경상감영에서 책을 펴내 대구·경북권과 부산·울산·경남권에 공급했으며, 근대 이후 상업용 출판과 활판인쇄기 제작으로 이름을 떨친 곳이다. 최근 대구시가 달서구 성서산업단지에 자리 잡은 대구출판산업단지의 이름을 대구인쇄출판밸리로 변경한 것도 이런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남산동 인쇄골목에 위치한 디지털인쇄협동조합에서 직원들이 일하고 있다. 김명규 기자


남산동 인쇄골목의 쇠락은 단순한 산업구조의 변화 탓이 아니다.
다른 인쇄소에서 만난 김종수 디지털인쇄협동조합 센터장은 "이제 인쇄업계는 인쇄소 간의 경쟁이 아니라, '플랫폼 경쟁'이 됐다"고 말했다. "협동조합처럼 10명 안팎의 직원이 있는 저희 같은 곳은 장비나 인력을 유지할 수 있지만, 규모가 작은 인쇄소는 무척 어렵습니다. 디지털인쇄기의 경우 싼 것은 10억 원, 비싸면 20억 원이다. 매출이 줄어드니 소규모 업체에서 새 기계를 사들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죠."
인쇄골목을 빠져나오며 문이 닫힌 인쇄소 내부를 창 넘어 들여다봤다. 먼지를 뒤집어쓴 인쇄기와 제판기가 인쇄소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었다. 기계는 멈췄지만, 한 시대를 찍어냈던 흔적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 돌아와 다시 전원 버튼을 누르기 만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김명규 기자 kmk@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