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2월,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주경야독했던 김석태(왼쪽 두 번째) 사관의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졸업식 모습. 왼쪽부터 동료 김종원 사관, 김 사관, 양풍원 구세군사관학교 교장, 강영자 교관이 참석해 그의 학위 취득을 축하하고 있다. 구세군 제공
1962년부터 구세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봉직하며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해가 갈수록 입학하는 사관후보생들의 지적 수준은 높아지는데, 정작 가르치는 나는 지식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자는 멈추지 않고 배워야 한다’는 열망이 나를 이끌었다.
나는 권경찬 교장의 허락
검증완료릴게임 을 받아 단국대 사학과 야간 과정에 편입했다. 낮에는 교관으로 생도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대학생이 되어 칠판을 바라보는 주경야독의 삶이었다. 역사를 공부하며 나는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기록된 전도서 1장 9절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됐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적 배경과 인류의 역사를 함께 이해하자 설교의 깊이가 달라졌고, 강단에서 생도들을 가르치는 데
야마토무료게임 도 큰 자신감이 생겼다.
이 시절, 하나님은 내게 귀한 ‘학문의 동지’를 붙여 주셨다. 구세군 조명화 정교(장로)였다. 이북 출신인 그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배움의 열정을 불태우며 나와 함께 편입했다. 학교 일과가 끝나면 정문 앞에는 어김없이 그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 안은 우리만의 이동식 강의실이었다. 우리는 광화문에서 한남동 캠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퍼스까지 쉬지 않고 토론을 벌였다. 넉넉지 못한 형편의 나를 위해 그는 등록금과 졸업 앨범비까지 남몰래 지원해 주었고, 68년 9월 우리는 나란히 졸업장에 입을 맞췄다.
배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구세군 사회사업의 학문적 체계를 세우기 위해 70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에 진학했다. 단순한 구호 활동을 넘어, 체계적인 복지 이론으로 소외
황금성사이트 된 이웃을 더 실질적으로 섬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나를 다시 책상 앞으로 이끌었다. 문제는 학비였다. 빠듯한 사관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님은 빈 주머니를 채워주셨다. 동료 폴 레이더 사관은 주한 미군 내 성도들을 통해 장학금을 연결해 주었다.
마지막 관문은 졸업 논문 인쇄비였다. 당장 논문을 찍어낼 5만원이 없어 며칠 밤
백경릴게임 을 설치던 어느 날, 레슬리 코트릴 사령관이 나를 불렀다. “김 사관, 논문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지? 이거 필요한 데 쓰게.” 봉투 안에는 딱 5만원이 들어있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호주에서 빵집을 하며 수익금을 보내던 덕종 은퇴 사관의 후원금이었다. 하나님은 지구 반대편의 손길을 통해서라도 내 필요를 정확히 채워주시는 분이었다.
73년 여름,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영국 런던에 있는 국제사관대학(ICO) 초청장이 날아온 것이다. 전 세계 사관 중 선발된 인원만 가는 영광스러운 자리였지만, 40대 중반인 내게 영어는 큰 장벽이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돕는 천사’를 예비해 두셨다. 영문과 출신의 탁종수 정위(대위)가 나와 함께 선발된 것이다. “김 사관님, 제가 통역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든든한 아론을 얻은 모세처럼, 나는 탁 정위와 함께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더 넓은 세상이, 더 큰 배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김용현 기자 fa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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