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부터 3월 9일까지 제주를 여행했다. <기자말>
[전갑남 기자]
제주의 봄은 바람의 결부터가 다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피부에 닿는 그 온기 속에는 단순히 기온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겹겹의 세월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아내와 나란히 앉아 제주동문시장의 명물인 고기국수 한 그릇을 비웠다. 진한 국물과 투박한 면이 주는 위로, 그것은 여행객의 하루를 소박하고도 평온하게 열어주는 의식과도 같았다.
여러 차례 제주를 다녀갔지만, 이번만큼은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먼 옛날의 흔적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었다.
"밥도
모바일릴게임 든든히 먹었으니, 이번엔 좀 특별한 곳으로 가보자고. 매번 스쳐 지나기만 했던 관덕정에 우리 고장 강화의 영웅, 양헌수 장군님의 숨결이 깊게 남아 있다고 하니 말이야."
내 제안에 아내는 벌써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발휘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의 발걸음은 제주의 심장부이자 600년 역사의 증언자인 관덕정과 제주목 관아로 향했다.
릴게임골드몽 제주 하늘 아래 펄럭이는 강화의 자부심, '수자기(帥子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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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연타 관덕정에 늠름하게 펄럭이는 수자기다. 강화도 정족산성의 승전보가 이곳 제주의 유비무환 정신에서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전갑남
제주목 관아 입구인 진해루를 지나 마당에 들어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서자마자 아내가 걸음을 딱 멈췄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하늘 한곳을 가리키며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저것 좀 봐! 저거 수자기아냐?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펄럭였던 바로 그 깃발!"
아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들떠 있었다. 강화 사람으로서의 본능적인 자부심이었을까.
릴게임갓 푸른 제주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을 잔뜩 머금은 채 늠름하게 몸을 뒤척이는 거대한 '장수 수(帥)' 자 깃발. 강화도 돈대나 광성보에서나 보던 그 상징적인 깃발을 머나먼 남쪽 섬 제주 한복판에서 마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제주목 관아 역사관 전시실에서 찾은 역대 부방어사 명단이다. 1864년 부임한 '양헌수(梁憲洙)'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어 역사의 현장임을 증명한다.
ⓒ 전갑남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관아 내부의 기록을 살피던 중 마침내 운명처럼 한 이름을 발견했다. '제주부방어사 양헌수'.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며 나라를 구하기 불과 수개월 전까지, 장군은 바로 이곳 제주에서 부방어사 겸 목사라는 중책을 맡아 이 섬의 국방과 민생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강화에서 만난 장군이 승전의 영웅이라면, 제주에서 만난 장군은 그 승전을 위해 칼날을 갈고 백성을 보살피던 '준비된 리더'였다.
돌비석에 스며든 온기, 백성을 살린 '내탕금(內帑金)'의 기적
관아 한편에는 세월의 이끼가 앉은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는 비석군이 있다. 그 수많은 비석 사이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양헌수 장군을 기리는 비석이 하나가 아니라 이웃하듯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장군이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관리들이 세운 '영세불망비(永세不忘碑)'였고, 또 하나는 그로부터 몇 년 뒤 마을 주민들이 장군이 해결해 준 고질적인 폐단을 잊지 못해 자발적으로 세운 '제폐비(除弊碑)'였다. 관리와 민초가 한마음으로 비석을 세웠다는 것은 그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 ?제주목 관아 비석군에 나란히 서 있는 양헌수 장군 기비다. 왼쪽은 관리들이, 오른쪽은 백성들이 장군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세웠다.
ⓒ 전갑남
두 비석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1865년 가을, 제주를 덮친 유례없는 태풍으로 도민들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장군은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조정에 간곡히 읍소했다. 결국 임금의 개인 비상금인 '내탕금' 2000냥을 받아내 제주 사람들을 구제해 냈다.
백성을 살리기 위해 왕의 주머니까지 열게 했던 그 지성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 비석이 이토록 정겹게 서 있을 수 있었을까. 백성을 위해 눈물 흘리던 '따뜻한 목사'와 성벽을 쌓으며 외세를 경계하던 '강직한 방어사'. 그 지극한 문무(文武)의 조화가 이 낯선 섬의 거친 돌 위에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아내는 비석을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강화에서도 제주에서도, 장군님은 늘 진심을 다해 사람들을 사랑하셨나 봐. 그래서 비석이 이렇게 따뜻하나 보다."
자리를 비운 게판(揭板), 그 너머에서 읽은 유비무환
▲ ?제주의 상징이자 양헌수 장군이 군사들을 조련했던 관덕정의 전경이다. 거센 바람을 견디기 위해 길게 뻗은 처마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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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을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마주한 관덕정은 그 건축미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했다. 특히 제주의 거센 비바람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유난히 길게 뻗어 나온 처마는 마치 장군이 휘두르는 도포 자락처럼 힘차게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정자 위로 올라 장군이 직접 썼다는 <관덕정기>(觀德亭記) 게판을 찾았다. 1865년 관덕정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후 그 의미를 새겨 걸었다는 기록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관덕정 내부에는 그 어떤 게판도 걸려 있지 않았다.
현장의 해설조차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할 만큼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고, 장군의 글을 포함한 소중한 기록물들은 이제 보존을 위해 박물관 수장고 등으로 자리를 옮겨 쉬고 있는 상태였다.
▲ ?관덕정 대청마루에서 바라본 천장의 모습이다. 화려한 단청 사이로 '탐라형승(耽羅形勝)'과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등 제주의 위상을 알리는 현판들이 보인다. 하지만 양헌수 장군이 직접 쓴 <관덕정기> 게판은 현재 보존을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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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나무판을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장군의 문집인 <하거집>(荷居集)에 전하는 그 글의 내용은 텅 빈 대청마루를 가득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장군은 <관덕정기>를 통해 활쏘기라는 무예의 형식을 넘어, 그 안에 담긴 '덕(德)'을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소에 마음을 닦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그의 문무겸비(文武兼備) 정신은, 훗날 강화의 승전보를 울리는 거대한 뿌리가 되었다.
1866년 정족산성 전투에서 549명의 포수를 이끌고 폭풍우 치는 밤 강화해협을 건넜던 그 기적 같은 승리는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곳 관덕정 마당에서 날마다 병사들을 조련하고, 화약을 점검하며, 제주의 처마 아래서 다진 그 인고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어 있는 게판의 자리가 오히려 장군의 빈틈없는 기개를 더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듯했다.
제주의 북소리, 강화의 파도가 되어 흐르다
▲ ?평화로운 분위기의 제주목 관아 내부 연못과 전각들이다. 과거 장군이 백성을 살피고 국방을 고민하던 고뇌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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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 광장은 장군의 기개만이 머문 곳이 아니다. 1901년 신축교안(辛丑敎案)의 아픔과 1947년 제주 4·3의 비극적인 총성이 시작된 우리 역사의 상처가 깊게 팬 현장이기도 하다. 장군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이 평화로운 섬이 겪어야 했던 풍파를 생각하니, 방금까지 따뜻했던 제주의 봄바람이 잠시 서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관덕정을 나서는 내 머릿속에는 내가 사는 강화 전등사 입구의 양헌수 승전비가 묵직하게 겹쳐졌다. 평소 전등사를 오가며 익숙하게 마주하던 그 비석이, 오늘 이곳 제주에서 만난 수자기와 비석들 덕분에 비로소 내 가슴속에서 뜨거운 온기를 지닌 채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화의 승전비가 장군의 빛나는 결과를 말한다면, 제주의 관덕정은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 장군이 감내했던 고독한 과정을 말해준다.
아내는 내 손을 꼭 잡고 광장을 벗어나며 환하게 웃었다.
"양헌수 장군님을 제주에서 이렇게 깊게 만나다니! 이번 여행, 정말 오길 잘했어!"
그 말에 내 마음도 제주의 햇살처럼 환해졌다. 강화의 이웃으로 살면서도 미처 다 알지 못했던 장군의 진심을, 나는 바다 건너 이 먼 섬에 와서야 비로소 온전히 마주했다. 관덕정 마당 위로 수자기가 다시 한번 세차게 몸을 뒤척였다. 마치 우리의 남은 여정에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갈 하루하루에도 장군의 그 뜨거운 진심이 함께할 것이라고 축복해 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