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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코리아가 최근 공식 SNS에 한국 드라마 명대사를 올렸다. ‘낭만 넘쳤던 그 시절, 마음을 사로잡았던 명대사들’이라는 문구와 함께였다. 영상 속 익숙한 얼굴, SBS 드라마 ‘파리의 연인’ 속 박신양.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 한마디. “애기야 가자.”
20년 전, 이 짧은 대사 하나로 여심을 휘어잡던 박신양. 그 장면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그는 여전히 ‘배우 박신양’이다. 이후 화가로의 전환이 종종 화제를 모으긴 했지만 그의 내면이나 생각까지 깊이 전해진 적은 드물다. ‘인간 박신양’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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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부터 작업실까지, 그는 거침없이 답했다. 돌려 말하지 않았고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배우라는 이름 뒤에 감춰졌던 시간들이 천천히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면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결국 같은 일이었습니다. 다만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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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는 붓을 든다. 연기를 내려둔 게 아니라 감정과 표현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다른 형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최근 일본 오사카에서 화가로서 첫 해외 무대에 오른 박신양 작가를 여행플러스가 경북 안동 작업실에서 단독으로 만났다.
박 작가는 ‘에곤 실레, 예주식공부책
술가의 표현과 떨림’을 출간했다. 1년 전 출간한 ‘제4의 벽’에 이은 두 번째 책으로 안현배 미술사학자와 함께 썼다. 화려했던 조명 아래 숨겨왔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예술가의 여정에 동행해본다.
Q. 해외 개인전은 처음인가? 일본에서 전시를 열어보니 어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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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플러스와 인터뷰 하고 있는 박신양 / 사진=조형주 여행+ PD
처음이다. 오사카 한국문화원 초대를 받았다. 배우로서 일본에 간 적은 있지만 화가로서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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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 뜻밖의 만남도 있었다. ‘제4의 벽’을 번역해 줄 지원자를 만났다. 장르 특성상 번역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망설임 없이 번역하겠다고 나선 분이었다.
내 생각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책이 해외에 소개되길 바라고만 있었는데 전시장에서 그런 분을 만나 기뻤다.
해외 전시는 국내보다 더 복잡했다. 절차도, 운송도 까다롭다. ‘보여준다’는 일이 실제로는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지 다시 체감했다. 초청해준 김혜수 원장과 오사카 한국문화원 관계자들 덕분에 좋은 경험으로 남았다.
그림을 판매하지 않기로 한 뒤로 국내 갤러리에서 전시 기회가 거의 없다. 상업 목적이 아닌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보여져야 한다’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다.
Q. 안동에 작업실을 열었다. 왜 하필 안동이었나.
박신양의 ‘사과 2(2022년)’ / 사진=권효정 여행+ 기자
안동에 임시 작업실을 뒀는데 임시라도 붓을 들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 느낀다. 사실, 어디에 작업실을 둘지 늘 고민이었다. 결국 물감 독성에 쓰러진 뒤에야 서울은 아니겠다는 결론이 났다.
서울을 떠나면 안 될 것 같다는 묘한 강박이 있었는데 그걸 떨쳐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환기가 잘 되는 조용한 곳에서 작업하겠다고 연고도 없는 안동으로 오게 됐다
사과가 자라는 지역은 일교차가 크다. 그런 기후가 무드를 바꾼다. 예술이란 결국 그런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시애틀도 사과가 많은 지역인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Q. 안동 외에 작업해보고 싶은 장소가 있나.
박신양의 ‘당나귀 22 (2017년)’ / 사진=권효정 여행+ 기자
많다. 개인적으로 (경남) 거제도를 좋아한다. 따뜻하고 묘한 매력을 가진 곳이다. 배를 타고 30분쯤 들어가면 나오는 작은 섬들이 있는데 그 섬을 산책할 때 기분이 참 좋다. 경상도와 강원도에도 이름조차 낯선 곳들이 많고 남해에도 작업해보고 싶은 장소가 꽤 된다. 그런 공간들이 주는 기운을 직접 마주하고 싶다.
Q.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여행지는 어디인가.
러시아 유학 시절에 만난 친구 키릴을 그린 박신양의 ‘키릴3 Kirill3 (2022년)’ / 사진=권효정 여행+ 기자
아무래도 (유학했던) 러시아가 아닐까 싶다. 친구들 고향인 에스토니아나 키르기스스탄도 인상 깊었지만, 러시아는 좀 달랐다. 여행하기 불편한 나라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는다. 문학, 음악, 예술 모두 강렬했고 잔상도 길었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들 중 많은 부분이 러시아에서 생겨난 건 분명하다.
Q. 전시로 연결하고 싶은 여행지가 있나.
작고한 현대 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쉬를 그린 박신양의 ‘피나바우쉬3 (2017년)’ / 사진=권효정 여행+ 기자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유바리라는 마을에 간 적이 있다. 2006년, 일본 최초로 지방자치단체가 파산을 선언한 도시다. 유바리는 공식 ‘망한 도시’로 불리지만 내가 본 유바리는 달랐다. ‘망한 것’ 외에는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사람이 살고 있었고 어떻게든 마을을 지키려는 이들을 만났다. 내가 지금껏 만나온 사람들 중 가장 적극적이고 단단해 보였다.
언젠가는 그곳에서 전시를 해보고 싶다. 예술의 본질은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데 있다. 이 가치를 실현하려면 가야 할 곳이 아직도 많다.
Q. 배우로서 살아온 시간이 그림에 어떤 영향을 줬나? 연기와 그림 중 어떤 쪽이 더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느끼나.
박신양의 ‘자화상3 (2017년)’ / 사진=권효정 여행+ 기자
배우로 지낸 시간은 그림에도 영향을 줬다. 장면 하나에 집중하던 습관, 감정을 밀어붙이던 방식이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다. 무대 위에서 ‘제4의 벽(무대와 관객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을 넘나들며 상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던 날들이 자꾸 겹쳐진다. 그 벽은 연기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무대에선 상상을 현실처럼 만들어야 했다. 맞은편엔 늘 관객의 시선이 있었다. 그 시선을 외면한 채, 오직 순간을 몰입해야 했다. 배우는 관객을 잊어야 하고 관객은 자신을 감춘 채 지켜본다. 그 긴장 위에서 연기가 완성됐다.
잊으려 했던 거리감이 지금은 자꾸 눈에 밟힌다. 그림을 그리며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예전엔 넘어서야 했던 그 경계와 시선을 다시 들여다본다.
사람들은 연기를 보여주는 일이라 말하지만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먼저 ‘하는 것’이었다. 감정을 믿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일. 그림도 마찬가지다. 기교보다 중요한 건 마음이 담겨 있느냐는 점이다. 관객이 바라보는 것도 결국 그 진심일 테니까.
매일 묻는다. 지금 이 감정은 어디로 흐르고 있나. 표현은 무엇을 향하고 있나. 그렇게 생긴 조각들을 그림 안에 하나씩 담아낸다.
누군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이라 말하겠지만 내겐 복잡하고 지난한 시간에 가깝다. 쉽게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과정이다. 생각보다 많은 것을 건네야 한다.
질문에 답하다 보니 또 다른 질문들이 이어졌다. 결국 남는 건 선택이다. 받아들일 감정과 외면할 감정, 그 사이 어디쯤을 택할 것인지. 그 반복이 지금의 그림이 됐다. 배우로 지낸 시간은 그런 질문들을 안고 있었다. 어쩌면 연기보다 먼저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땐 꺼내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Q. 치열하게 작업해왔다. 한때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는 의문이 들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 답을 갖고 있나.
작업하고 있는 박신양 작가의 모습 / 사진=박신양 웹사이트
‘자신과 마주한다’는 말, 쉬워 보여도 가장 힘든 일 같다. 솔직히 피하고 싶을 때가 더 많다. 끝도 없고 한없이 버겁다.
그래서 누군가는 내가 나 자신을 너무 몰아붙인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내가 선택한 방식이다. 연기도, 그림도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 끝까지 가봐야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 그런 방식밖에 내겐 없었고 다른 길은 애초에 알지 못했다.
Q. 작품이 소유되지 않고 공유될 때 더 가치 있다고 보는가.
그림을 소유하는 건 자연스럽다. 전시장에 걸렸다가 어느 집 벽에 걸리는 것도 흔한 일이다. 하지만 난 처음부터 그림을 팔 생각은 없었다. 모두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꼭 나도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예술가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배우는 어렵지만 화가는 가능하다.
어디에 걸릴지가 아니라 어떻게 보여질지가 더 중요했다. 가능한 많은 사람이 편견 없이 온전히 마주했으면 했다.
첫 전시를 했던 mM아트센터처럼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오사카 전시가 좋았던 것도 그런 이유다.
Q. 작품은 감상자가 있어야 완성된다고 말했다. 관람자에게 어떤 감정으로 닿기를 바라나.
박신양의 ‘당나귀13 (2017년)’ / 사진=권효정 여행+ 기자
있는 그대로 봐주면 좋겠다. mM아트센터 전시 때 그림 앞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감정이 잘 전달돼서였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들이 그림 속에서 자기 감정을 마주했기 때문일 거다. 억눌렀던 감정, 혹은 잊고 지냈던 감정. 그런 감정들이 그림을 통해 불쑥 올라오는 순간이 있다. 그게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Q. 신간 ‘에곤 실레, 예술가의 표현과 떨림’에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
여행플러스와 인터뷰 하고 있는 박신양 / 사진=조형주 여행+ PD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었다. 요즘은 사회가 원하는 모습에 맞추느라 다들 얼굴에 가면을 쓰고 산다. 경쟁 속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 내가 사라지고 방향도 흐려진다.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런 순간에 멈춰서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래서 감정을 표현하는 건 어떤 방식이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에곤 실레를 통해서는 설명하기 어렵고 낯선 감정들을 작가의 시선으로 풀어보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는 도대체 어떤 고민을 안고 있었을까. 그걸 계속 생각하며 글을 썼다.
첫 책을 낸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빨리 두 번째 책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Q. 에곤 실레와 대화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보고 싶은가.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다. 그냥 오래 바라보고만 있을 것 같다. 말이나 글은 감정을 담기에 부족할 때가 많다. 어떤 감정은, 애초에 언어로는 닿지 않는다.
안동(경북) / 글 = 권효정 여행+ 기자, 영상 = 조형주 여행+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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