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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대 초반, 이름이 가물가물한 대만의 군 출신 외교관에게 중·일전쟁 얘기를 들었다. "일본군은 용감하고 지휘관들의 전략도 탁월했다. 무기 성능은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사망자 비율이 일본군 1명에 중국군 10명이었다. 중국군은 장제스(蔣介石)가 직접 지휘한 중앙군 외엔 일본군이 지칠 때까지 기를 쓰고 도망만 다녔다. 인구가 워낙 많다 보니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의 동상 세워주고 열사라 추앙하는 것이 도망 다닌 사람들의 의무였다. 일본군은 불쌍했다. 혼자 전쟁하느라 수선 떨다 기력을 소진하고 제 발에 나가떨어졌다." 전쟁초기, 문호(文豪) 린위탕(林語堂)이 했다는 말도 들려줬다.
백경게임랜드 "일본군은 사막을 달리는 신형자동차와 같다. 그냥 내버려두면 고철로 변한다."
쩡중밍(앞줄 왼쪽 셋째)이 리옹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 받는 날 파리 고등미술학교 재학중인 팡쥔비(方君璧 앞줄 왼쪽 넷째)와의 결혼 기념사진. 1921년 봄 중국의 중법대학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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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간(大漢奸)이라는 낙인이 지워지기 힘든 왕징웨이(汪精衛)에 관한 평도 들을만했다. "왕징웨이는 자타가 인정하는 국부 쑨원(孫文)의 후계자였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군권(軍權)보다 당권(黨權), 투쟁보다 화합에 집착했다. 군권을 장악한 장제스와 합작과 결별을 반복했다. 두 사람은 성
카카오야마토 격이 딴판이었다. 장은 상대를 안심시킨 후 기습으로 제압하는 일석삼조(一石三鳥)의 고수였다. 의논은 질색이었다. 보고 받고 명령만 하면 그만이었다. 왕은 달랐다. 상대방의 주장을 끝까지 듣고 설득에 능했다. 대중 연설은 발군이었다.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도 남았다. 눈에는 협기(俠氣)가 넘치고 시와 문장은 일품이었다. 인물도 굉장했다. 중국 최고의 미남이
야마토게임예시 라며 여성들에게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평화 시라면 모를까 전시에는 적합하지 않은, 중국식 비극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침략자 일본의 속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침략자와 평화회담 하겠다며 전시 수도 충칭(重慶)을 떠나 하노이에 안착했다. 이유가 있었다. "일본은 중국을 정복하지 못한다. 자원이 부족하다 보니 전략 물자인 석유와 고무를
바다신릴게임 확보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우리는 혁명과정에서 일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무력 충돌보다 양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장제스의 보검(寶劍)인 국민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 국장 다이리(戴笠)가 하노이에 암살단을 파견했다. 자객들은 왕이 총애하던 비서 쩡중밍(曾仲鳴)을 왕으로 착각했다. 쩡이 왕 대신 자객들의 총탄 세례를 받고 즉사했다. 화가로 이름난 쩡의 부인도 총탄 세 발을 맞았지만 목숨은 건졌다. 왕의 처형도 대단한 여자였다. 쑨원이 일본에서 조직한 동맹회의 암살부 부장이었다."
왕징웨이 사망 후 일본을 방문한 천궁보.
하노이의 총성은 국민당 부총재 왕징웨이가 일본에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는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왕은 일본과 합작을 작심했다. 일본군이 점령한 전 수도 난징(南京)으로 돌아와 쑨원의 초상화와 청천백일기를 게양하고 충칭으로 도망갔던 국민정부의 환도(還都)를 선언했다. 천궁보(陳公博)를 필두로 장제스와 척을 진 정객들의 참여가 줄을 이었다.
천궁보는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에서 열린 중공(중국 공산당) 1차 대회에 참석한 13명 중 한 명이었다. 창당 요원이었지만 공산당에 실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싹수가 노랗다는 생각이 들자 탈당계 내고 미국으로 갔다.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원서 내고 학비 걱정하던 중 우연히 왕징웨이를 만났다. 왕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만남이 계속될수록 천이 맘에 들었다. 학비는 물론 살 집과 식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천은 1924년 '중국에서의 공산주의(共産主義在中國)'로 석사 학위를 받고 고향 광저우(廣州)로 돌아왔다. 국민당에 입당하자 왕징웨이와 랴오중카이(廖仲愷), 두 혁명 원로의 지지와 신임을 한 몸에 독차지했다. 당 핵심에 진입하기까지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천과 쩡중밍은 왕의 그림자였다. 둘 중 한 사람이 보이면 근처에 왕이 있다고 단정해도 틀리지 않았다.
왕징웨이도 처음에는 일본과의 전쟁을 주장했다. 평화적 해결로 방향을 틀자 천궁보도 생각을 바꿨다. "중·일간 발생한 모순의 군사적 해결은 불가능하다. 외교에 집중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장제스가 발끈했다. "천궁보를 당 쓰촨(四川)성 책임자로 내보내라." 쓰촨성 청두(成都)에 있던 천은 왕이 하노이에 둥지를 틀자 짐을 챙겼다. 조용히 하노이로 갔다. 1940년 3월 30일 '난징국민정부' 수립을 선포한 왕은 천을 입법원장에 임명했다. 중요정책 결정에 왕과 머리를 맞댄 천은 누가 봐도 난징정부의 2인자였다.
한간 재판 심문대에 선 천궁보.?
1944년 11월 10일 오후 4시 20분, 왕징웨이가 나고야의 제국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천궁보가 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9개월 후 일본이 무조건 투항하자 천도 정부 해산을 선언했다.
왕징웨이의 '난징국민정부'는 5년 5개월 하고도 18일 간 존속한 일본의 괴뢰정부였다. 소재지는 장쑤(江蘇), 저장(浙江), 안후이(安徽), 세 개 성(省)과 상하이와 난징을 포함한 국민당 통치의 중심 지대였다. 굵직한 한간(漢奸)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이다 보니 체포에 신경을 썼다. 왕이 죽은 마당에 제1호 한간은 천궁보였다. ?
1946년 4월 5일 오후 2시 15분, 천궁보가 장쑤성 고등법원 제 1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간 만화 같은 곡절이 많았다.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