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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 앞 거리에 APEC 개최를 기념하는 환영 현수막이 줄지어 걸려 있다. / 사진=차재연 인턴기자


경주는 최근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로 떠올랐습니다. 이번 회의에는 21개 회원국 대부분에서 정상급 대표가 참석해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특히 '경주선언', 'AI 이니셔티브', '인구구조 변화 대응 공동 프레임워크'가 채택되면서 실질적인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회의 기간 경주는 한국 문화를 세계에 황금성사이트 선보였습니다. 월정교 일대에서는 1만 1,000여 명이 관람한 한복 패션쇼가 열렸고, 보문 멀티미디어 쇼는 누적 1만 5,000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천년 신라왕국의 고도' 경주의 문화적 저력을 입증했습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과 가진 '치맥 회동'은 국내 온라인뿐만 아니라 CNN 등 외신에도 보도되면서 국내외 온라인야마토게임 큰 이목을 끌었습니다. 올리브영 경주황남점의 외국인 매출 비중은 평소 20% 수준에서 60%로 급증했습니다.
정부와 경주시 등은 이번 성과가 단발성에 그치지 않도록 '포스트 APEC'에 속도를 내겠다는 방침입니다. 특히 이번 회의에서 경주의 문화, 관광자원이 세계에 소개된 만큼 이를 토대로 경주를 글로벌 10대 문화관광도시이자 국제회의도 야마토게임 시로 도약시키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또한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높아진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경주와 경북을 포함한 지방으로 확산시키겠다는 구상도 포함됐습니다.
그렇다면 APEC 이후 이러한 청사진은 경주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이를 확인하기 위해 기자가 1박 2일 동안 경주 곳곳을 직접 둘러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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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박객만 남은 보문관광단지






한낮의 보문관광단지 입구 도로. 인도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 사진=차재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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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관광객이 거의 없어요"

지난 8일 낮 12시쯤 찾은 경주 보문관광단지는 적막한 모습이었습니다. 텅 빈 도로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만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택시 기사 A씨는 APEC 정상회의가 열린 화백컨벤션센터(HICO)와 경주월드 등 주요시설이 인접해 있음에도 "이쪽은 관광하러 오는 사람보다 숙박을 위해 오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APEC의 주무대였던 HICO 주변 보문관광단지는 경주시가 내세우는 대표 관광지입니다. 보문동, 신평동, 암곡동, 천군동 일대에 조성된 이곳은 보문호수를 중심으로 휴양 시설과 문화 레저시설이 모여 있습니다. 경북문화관광공사에 따르면 경북도와 경주시는 이번 APEC 정상회의를 맞아 150억 원을 들여 보문단지 야간 경관을 개선했습니다. 보문호반광장에는 신라 건국 신화 속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본뜬 높이 15m짜리 대형 조형물이 들어섰고, 단지 일대 도로는 새로 포장됐습니다. 보문호에는 초승달 모양 전동 보트도 도입됐습니다.
하지만 접근성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경주역 관광안내소 직원은 보문단지 교통편으로 시내버스를 안내하면서 "이미 버스가 출발해 다른 버스를 타고 환승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국제행사가 열린 대표 관광지임에도 전용 셔틀버스는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환승을 포함해 경주역에서 보문단지까지 이동하는 데는 약 1시간이 걸렸습니다.



보문관광단지 주차장이 한낮에도 텅 비어 있다. / 사진=차재연 인턴기자


도착한 보문단지 내 주차장은 대부분 비어 있었고, 버스 배차간격은 30분을 넘어 일정에 맞춰 이동하기 위해서는 택시 이용이 불가피했습니다. 보문단지에서 관광객이 자주 찾는 황리단길로 이동하는 데는 택시비 1만 4,400원이 들었습니다.
경주시에 따르면 올해 10월 1일부터 11월 4일까지 약 한 달 동안 경주를 찾은 외지인 방문객은 589만 6,309명으로 집계됐습니다. 지난해 같은 기간 479만 8,838명보다 22.8% 증가한 수치입니다. 하지만 통계와 달리 보문관광단지 일대에서는 관광객 증가 효과를 체감하기 어려웠습니다. 행사 종료와 함께 관심이 빠르게 줄어들면서 지속적인 관광객 유입에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보문단지가 단순 숙박 거점을 넘어 지속 가능한 관광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황리단길만 붐비는 경주, 비어 있는 밤거리






평일 오후 황리단길의 한 인기 빵집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 사진=차재연 인턴기자



다음날인 9일 오후 2시에 찾은 경주 황리단길. 빵으로 유명한 한 가게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가게 입구에는 '빵이 소진되었습니다', '1시부터 판매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황리단길의 한 소품샵 앞에서 만난 호주 관광객 클레어(27)는 "한국 방문은 세 번째지만 경주는 처음"이라며 "황리단길에서 즐기는 음식과 쇼핑, 역사가 모두 좋다"고 말했습니다. 전날 인적이 드물었던 보문관광단지와는 대조적인 풍경이었습니다.

경주 관광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이처럼 관광객이 특정 지역에 집중된다는 점입니다. 황리단길과 첨성대 등 인근 주요 관광지는 마을버스나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보문관광단지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있습니다. 한진영 한국 마이스관광학회 회장 겸 가톨릭관동대학교 호텔관광경영학전공 교수는 "신경주역-보문단지-도심·유적지를 잇는 내부 동선 설계가 아직 매끄럽지 않다"며 "체류형 도시가 되려면 '한번 와서 이곳저곳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는 구조'가 필요한데, 지금은 행사장-호텔-일부 관광지에 동선이 갇히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는 곳이라고 해서 불편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첨성대 앞에 관광객들이 모여 첨성대 야간 미디어파사드를 관람하고 있다. / 사진=차재연 인턴기자


밤이 되자 첨성대 앞에 미디어아트를 보기 위한 인파가 몰렸습니다. 첨성대 외벽 전체를 무대로 활용한 야간 미디어파사드는 매일 오후 6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1시간 간격으로 세 차례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첨성대 앞에서 만난 일본인 관광객 미유(22)는 "밤에 보는 첨성대는 매우 아름답지만 다 보고 나면 갈 곳이 없다"며 "주변 상점이나 카페가 일찍 문을 닫아 어쩔 수 없이 호텔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오후 8시 30분, 첨성대 인근 빵집과 카페들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 사진=차재연 인턴기자


기자가 마지막 회차인 오후 8시 30분 상영을 관람한 뒤 주변 상권을 돌아보니 이미 문을 닫은 가게가 대부분이었으며 골목은 불이 꺼져있었습니다. 지도를 확인해도 가장 늦게까지 문을 여는 곳이 오후 9시 폐점인 가게에 그쳤습니다.
경주의 야간 자산은 대릉원, 월정교, 동궁과 월지 등으로 풍부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야간 공연, 거리 프로그램, 상권 활동이 충분히 따라붙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한 교수는 "야간 개장과 로컬 스트리트 콘텐츠 등이 아직 충분히 다양하지 못해 '사진 찍고 바로 숙소로 돌아가는 패턴'이 여전히 강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밤에 할 게 많다'는 인식이 형성되지 못하면 체류 일수는 자연스럽게 짧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행사 도시를 넘어 체류의 도시로

APEC 정상회담 이후 경주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주목받지 못하는 관광지, 특정 지역으로의 관광객 쏠림, 야간 프로그램 부재 등이 한계로 지적되는 가운데 이영찬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정보경영학과 교수 겸 한국 APEC 학회 상임이사에게 경주의 과제를 물었습니다.

Q. APEC 기간 경주는 방문객·숙박·상권이 크게 활기를 띠었지만, 행사 종료 후에는 다시 평소 수준으로 돌아갔다는 분석이 있습니다.이영찬 교수 "APEC 기간에는 분명히 활기가 있었습니다. 정상회의에 온 각국 대표단과 수행원만 해도 수천 명이고, CEO 서밋 참가인원까지 합치면 대략 2만 명 가까운 외부 인원이 경주를 찾았거든요. 인구 24만 명대인 도시에서 그 정도면 단기간에 상당한 수요가 유입된 셈입니다. 자연스럽게 숙박률이 오르고, 주변 상권 매출도 눈에 띄게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다만 이런 변화는 국제행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단기 집객 효과'에 가깝습니다. 일주일 정도 행사가 열리는 기간에 손님이 한꺼번에 몰리는 구조죠. 그 이후에 머무는 시간을 더 늘려줄 만한 요소, 예를 들어 사후 프로그램이나 추가 일정이 충분하지 않다면 행사가 끝난 뒤 다시 평소 수준으로 돌아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입니다."
"경주가 가진 가장 큰 한계는 방문 증가를 ‘체류 증가’로 연결해 줄 구조적인 장치가 아직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경주는 APEC을 계기로 관심을 얻고 '특수효과'를 누리고 있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 효과를 상품이나 프로그램, 산업으로까지 연결해 체류형·비즈니스관광으로 확장하는 단계는 아직 초기라고 봅니다. 관심은 확보했지만, 그 관심을 오래 머무는 수요로 바꿀 수 있는 인프라와 콘텐츠는 이제 성장단계에 들어섰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Q. 교통접근성·야간 콘텐츠 부족 등이 APEC 현장에서 한계로 지적됐는데, 이러한 문제 제기가 타당하다고 보시나요?이영찬 교수 "타당한 지적이라고 봅니다. 교통과 이동 동선이 관광객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정류장이나 시내 이동 경로가 직관적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구조가 아니에요. 관광 동선도 점 형태로 끊어져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첨성대 주변처럼 대릉원 일대까지 걸어 다니며 이어지는 구간은 도시 경험의 흐름이 살아있는 편이지만, 그 외 지역은 관광지가 서로 흩어져있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한 번에 동선을 잡아 자연스럽게 연결해 다니기보다는 '차 타고 여기, 또 차 타고 저기' 식으로 움직여야 하는 구조라 체감 난도가 높습니다."
"야간 활동 역시 큰 약점입니다. 코로나19 이후로 저녁 7시만 넘어도 도시 활동이 급격히 줄어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통시장을 포함해 밤 시간대에 머물면서 즐길만한 장소와 프로그램이 많이 줄었고, 관광객으로서는 '저녁 이후에 할 일이 없다'고 느끼기 쉬운 환경입니다.다. APEC을 계기로 이런 부분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온 만큼, 이제는 실제 개선으로 이어지도록 구체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APEC 이후 경주가 지속 가능한 관광·MICE 도시로 성장하려면 가장 중요한 전략적 방향은 무엇이라고 판단하시나요?이영찬 교수 "저는 경주가 단순한 관광도시를 넘어서 '문화·창의·지식을 기반으로 한 글로벌 포럼 도시'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경상북도와 경주시는 '포스트 APEC 10대 핵심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하나로 경주에서 세계경제포럼 성격의 포럼을 정례화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런 포럼이 정착되면 자연스럽게 학술대회, 부대행사, 문화 행사, 청년·유스포럼 등이 연계되고, 기존의 문화·관광 자산과 시너지를 내는 허브가 될 수 있습니다. APEC에서 논의된 AI 협력, 인구구조 변화 대응 같은 의제도 경주 지역 현안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이런 주제를 다루는 포럼과 학술대회를 경주에서 지속적으로 이어가면 도시의 정체성과 전략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야간 경제와 체류형 콘텐츠 강화도 병행돼야 합니다. 보문단지나 월정교 일대의 야간 관광, 공연·예술·미디어아트가 결합한 콘텐츠 등이 대표적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인적서비스와 스마트관광의 결합입니다. 기본적인 환대와 안내 서비스를 표준화·고도화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통합 스마트관광 시스템을 함께 구축하는 방향이 필요합니다. APEC은 끝났지만, 지금부터 포럼 도시, 문화·MICE 도시로의 전환을 차근차근 준비한다면, 경주가 단순 관광지를 넘어서는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경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한 번 찾은 방문객이 '하루만 더 머물까?' 혹은 '다시 한번 가볼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체류형 도시로의 전환입니다. 야간 관광 자원과 지역 상권, 각종 포럼·문화프로그램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경주는 '다시 오고 싶은 도시'라는 평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과제를 얼마나 충실히 개선해 나가느냐가 APEC 이후 경주가 맞닥뜨린 첫 시험대가 될 것입니다.
[차재연 디지털뉴스부 인턴기자 chajy10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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