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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도 주택이었고 여기도 다 주택이었고… 이거 다 주택이었습니다.”
지난달 29일 경북 영덕군 대곡리. 마을 주민이 가리킨 곳은 텅 비어 있었다. 집들이 모여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 3월 말 영남 산불 직후, 일주일 동안 불탄 집들이 잿더미가 되어 쌓여 있었다. 지금은 화마의 흔적도 대부분 사라져 영덕군 석리와 노물리에만 일부 불탄 건물이 남아 있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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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에 휩쓸린 경북 주택 ‘흔적 없이 사라지다’
경북 산불의 대표적 피해 마을인 의성군 사촌리엔 임시 주택이 들어서는 중이었다. 최청자(83)씨는 “63년째 이곳에 살면서 이 정도로 큰 규모의 불난리를 처음 겪었다”고 했다. 주위 8채 중 최씨 집만 빼고 모두 전소했다. 이웃들은 근처 체육관에서 임시로 지내는 중이다. 단위환산 그는 “내가 살맛도 안 나. 쓸쓸해 죽겠구먼. 혼자(만) 여기 (남아) 살고…”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영덕의 대곡리 마을은 42가구의 집 중 5채만이 화마에서 살아남았다. 이미 철거 작업이 시작돼 곳곳이 비어 있었고, 포크레인이 굉음을 내며 건물 잔해를 쓸어 담았다. 대곡리 주민 김경호(63)씨는 3월25일 산불 당일을 회상하며 “불구덩이 변제 에 있어 본 사람 아니면 누구라도 그 심정을 모른다”며 한숨을 지었다. 그는 가장 걱정되는 부분으로 ‘마을 소멸’을 꼽았다. 주민 중 세입자였던 이들은 자기가 살던 곳에 다시 집을 짓기 어려운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경북 의성 상화2리 주택 피해 현장. 기후위기기록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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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사촌리 피해 주택 철거 현장. 손주영
철거된 집터를 가리키는 경북 영덕 대곡리 주민 김경호(63)씨. 취득세 계산기 손주영
경북 영덕 노물리에 산불로 무너져내린 건물 잔해가 쌓여 있다. 손주영
동해안과 맞닿은 영덕 노물리는 관광지 ‘블루로드’로 유명하다.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던 마을이지만, 지난달 29일 길거리에서는 마을 이장과 경로당 총무, 보험회사 직원만 볼 수 있었다. 이 마을에선 강풍을 타고 의성에서 넘어온 산불로 인해 236세대 중 170여 가구가 전소했다. 배도 30척 중 절반가량이 타버렸다. 어업과 관광업으로 살아가는 노물리 주민들은 생계에 직격탄을 맞았다. 이장 김재현(62)씨는 “(주민들이)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데 당장 주머니에 돈이 없다”며 걱정했다.
대형 산불 주택 피해, 답은 ‘산림 인접 비상소화장치’
이번 경북 산불로 의성, 안동, 청송, 영양, 영덕 등 5개 시·군에서 4400여동의 주택이 불탔다. 산불에서 주택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대책은 이미 나와 있다. 바로 ‘산림 인접 비상소화장치’다. 이는 소화 장치함과 호스릴, 앵글밸브 등으로 구성된 일체형 소방시설로, 호스를 옥외 소화전 등과 연결해 사용한다. 산불 발생 시 신속히 물을 뿌려 초기 대응력을 높일 수 있다. 국내에선 벌써 효과가 입증돼 각 시도에 보급돼 있다. 강원 산림 인접 마을엔 비상소화장치가 1852개가 설치돼 있다. 강릉 547개, 동해 220개, 속초 133개, 삼척 171개, 고성 324개, 양양 228개, 영서 229개다. 2019년 고성·속초 산불 시기 고성군 홍와솔 마을이 선례가 되어 강원 영동 지방 중심으로 설치됐다.
당시 홍와솔 마을에선 주민들이 자체 경비로 구매한 비상소화장치를 이용해 22채 중 18채를 지켰다. 홍와솔 마을회장 이종현(69)씨는 “연기가 나서 사람들이 다 대피할 때 몇몇은 (비상소화장치로) 집과 산에 물을 뿌렸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씨는 “최근에도 옆 산에서 불이 났을 때 사람들이 소화전을 펼쳐놓고 기다렸다”고 덧붙였다. 이밖에도 2021년 강릉시 주문진읍 교향리와 동해시 망상동 괴란마을, 2022년 양구군 청우리, 2022년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 2023년 강릉시 저동 황토민박 등이 비상소화장치를 통해 주택 피해를 막았다.
강원 고성의 비상소화장치. 손주영
강원 고성 홍와솔 마을의 비상소화장치. 손주영
경북엔 비상소화장치 654개 설치 예정…‘여전히 부족’
하지만 경북에서 산림 인접 마을에 설치된 비상소화장치는 458개로 아직 미비하다. 특히 경북 북부엔 영덕(96개)을 제외하고, 안동 2기, 의성 5기, 청송 10기, 영양 1기밖에 없다. 경남과 울산 또한 각각 15개, 40개로 턱없이 부족하다. 최근 산불이 났던 대구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인구 20만명인 강릉엔 547개가 설치돼 있으나, 인구 236만명인 대구엔 단 하나뿐이다. 소방청은 경북에 비상소화장치가 부족한 이유에 대해 “그동안 대형 산불이 강원 지역에 집중됐기 때문에 그곳부터 설치를 서두른 것”이라 했다. 올해는 51억6300만원의 추경 예산으로, 전국 산림 인접 마을에 1199개의 비상소화장치가 설치될 계획이다. 경북엔 654개가 배정됐다.
경북의 산림 면적은 133만3691헥타르(ha)로, 경북 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한다. 강원과 산림 면적 자체는 비슷하나, 경북엔 강원의 2배인 116만여가구가 산다. 이번에 추가 설치되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경북 읍면동(233개) 비상소화장치는 평균 3.4개뿐이다. 강원 읍면동(187개)의 비상소화장치 수는 평균 9.9개로, 경북과 2배 이상 차이 난다.
보통 산림 인접 비상소화장치 설치 시, 정부가 설치 비용의 50%를 부담하고 지자체가 나머지 50%를 부담한다. 경북소방본부는 이런 국비 보조 사업으로 2022년 울진에 71개, 2023년 경주에 146개, 영덕에 84개를 설치해 왔다. 그런데 지난해 정부 보조금이 끊겼다. 이에 따라 경북도청 예산만으로 20개 시군에 40개가 설치되는 것에 머물렀다. 지난 2022년 소방청 산하 국립소방연구원은 산불비상소화장치 관련 연구보고서를 내고 효과 검증까지 마쳤으나, 현장에선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것이다.
예비 주수를 한 경우(왼쪽)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차이. 예비 주수란 산불 발생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 미리 소화액과 물을 뿌려 화재를 예방하는 것을 말한다. 국립소방연구원
산불이 앗아간 건 ‘마을’ 그 자체
이번 산불로 큰 피해를 본 지역(의성, 청송, 영양, 영덕, 안동)에서 노인 인구는 약 41.8%를 차지한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 80~90년을 살아온 그들은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빼앗겼다. 영덕 대곡리 주민 허영숙(72)씨는 “이분들 돌아가시고 나면 집이 다 비는데 이 마을 자체가 없어질 것 같다”며 마을의 존립을 걱정했다.
현재 5개 시군에 총 2722동 임시주택이 공급될 예정이다. 새로운 집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주민들의 트라우마를 한순간에 씻을 수는 없다. 산불 비상소화장치 공백을 채워, 같은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예방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손주영(한겨레교육문화센터 기후위기기록단)
편집자주
초유의 산불 재난으로 기록되는 영남 산불이 일어난 지 한 달을 넘기고 있다. 30명 넘는 인명 피해와 4000동 넘는 주택·시설 피해, 그리고 4000명에 가까운 이재민이 발생했다. 국제뉴스를 통해 접했던 ‘기후위기’ 재난으로서 산불이 한반도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이재민에 대한 피해 지원과 복구로 분주한 가운데 이번 대형 산불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 무엇을 살펴야 하는지 기후위기 재난의 당사자인 청년의 시선과 발걸음으로 4회에 걸쳐 살핀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현장에 대한 기록과 관찰’을 교육받은 청년들이 산불 현장을 다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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