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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독일 육군사관학교 운동장. 한국에서 온 다부진 체구의 유학생이 양 무릎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리고 있었다. 지난 26일 76세를 일기로 별세한 고(故)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이다. 한국 육사를 대표해 독일에 유학 온 그는 달리기에서 독일인 생도들에게 뒤지는 게 억울했다고 훗날 가까운 지인들에게 털어놨다. 그가 택한 방법은 맹연습. 모래주머니 투지 루틴을 반복한 그는 어느덧, 자신보다 잘 달리던 독일인 생도를 기어이 이겼다고 한다. 그의 별세를 추모하며 익명을 요청한 국방부 전직 핵심 당국자가 중앙일보에 27일 전한 일화다. 해외여행 자율화가 되기 이전, 재택부업 독일 유학이라는 특전을 받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천안함 사건 등 격변의 시기 국방부 수장으로 바쁜 시기를 보내면서도 새벽 러닝은 잊지 않았다고 한다.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육사 29기로 정책과 야전 다방면에서 풍성한 경험을 쌓았다. ▶6포병 여단장 ▶23사단장 ▶국방부 정책기획국장 ▶수도방위사령 신용보증보험 관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육군 제1야전군사령관 등을 요직을 두루 거치며 합참의장이 됐다. 이후 김 전 장관은 2009년 9월 제42대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합참의장 재직 시기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국방개혁, 군 전력 구조개편 등 주요 군사현안에 이해도가 깊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정부 내에선 군 정책의 연속성과 조직 안정화를 이끌 적 영화제공 임자라는 얘기가 나왔다.
야전 지휘관뿐 아니라 육군사관학교 교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근무 경력도 갖춰 ‘문무 겸비형 장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통역 없이도 숱한 국제회의에 참여할 정도로 탁월한 영어실력을 지녔고, 퇴근 후에도 공부하는 대표적인 장군으로 꼽혔다. 그와 함께 근무했던 국방부 당국자는 “퇴근 후엔 관사로 서류들을 다 가져가 개인신용회복위원회 일일이 다 읽고 코멘트를 달아 건네주곤 하셨다”고 회고했다.
천안함 폭침 다음날인 2010년 3월 27일 백령도 현지를 찾아 보고를 받고 있는 김 장관. [중앙포토]
김 전 장관은 취임 후 ‘일류 국방경영’, 용암천 ‘강한 군대’, ‘국민의 국방’을 내세워 국방개혁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전면전 대비와 함께 국지도발, 테러 같은 다양한 위협에 대응할 수 있도록 군 구조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안보 위기 국면을 맞았다. 북한의 국지도발에 군사대비태세의 허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비판 여론이 거셌다. 김 전 장관은 사의를 표했지만 청와대의 선택은 유임이었다. 흔들리는 군심을 결집하고 국방개혁의 남은 과제를 완수하는 데 그의 역할이 남아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23일 발생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국면에선 결국 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의 수용이라는 형식을 빌린 사실상의 경질이었다. 그는 이렇게 군의 대응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여론을 뒤로 하고 1년 2개월 만에 국방부 장관에서 물러났다. 김 전 장관과 함께 근무한 군 당국자는 “합리적 의사결정, 온화한 성품으로 부하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국방부 장관 퇴임 이후에는 군인 자녀를 위한 기숙형 사립고등학교인 한민고등학교 설립을 주도해 2011∼2016년 학교법인 한민학원 이사장을 맡았다. 또 ▶한국전쟁기념재단 이사장 ▶육군포병전우회 회장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 공동대표 등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범숙 씨, 아들 김대업 씨, 딸 김희수 씨가 있으며,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17호실)이다. 영결식은 다음 달 1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에서 합참장(합참의장 주관)으로 열린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