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포트.
1975~79년 캄보디아를 통치한 크메르 루주(붉은 크메르) 지도자 폴 포트(1925~1998)는 집권 기간 자국민 200만명을 학살했다. 당시 캄보디아 인구 4분의 1에 이르는 숫자다. ‘농민 천국’을 만든다는 기치를 내걸고 ‘국민 개조’라는 명분으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1984년 영화 ‘킬링 필드’를 통해 참상이 널리 알려졌다. 캄보디아 공산화 이후 처음으로 1988년 입국한 조선일보 기자는 학살 현장 중 하나인 프놈펜 인근 처형장의 참상을 전했다.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킬링필드’의 현장 중아이 처형장이
바다이야기2 다. 캄푸치아(캄보디아)의 성(省)이나 군(郡)마다 이런 학살장이 없는 곳이 없지만, 이곳이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이고 규모도 가장 큰 처형 장소라고 안내인은 설명한다. 폴 포트가 장악한 크메르 루주는 78년 9월부터 12월까지 불과 4개월 동안 이곳에서 1만3천명 이상의 지식인과 가족을 학살 매장했다는 것이다. 거의가 10대 소년들로 구성된 폴 포트군
바다이야기무료머니 (軍) 병사들은 2m 간격으로 구덩이를 파게 하고 한 구덩이에 평균 1백명씩을 몽둥이나 돌로 쳐죽여(총알을 아끼기 위해) 묻어버렸다는 얘기다.”(1988년 6월 12일자 7면)
1988년 6월 12일자 7면
폴 포트
바다이야기게임다운로드 는 1949년 프랑스 유학 후 1953년 귀국해 공산당에 가입했다. 10년 간 사립학교 교사로 활동하다 1967년부터 밀림 지대를 근거지 삼아 반정부 무장 투쟁을 벌였다. 1975년 친미 론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다. 폴 포트가 이끄는 무장 공산주의 단체는 프랑스어 ‘붉은’이라는 뜻의 루주와 캄보디아 대표 민족 크메르를 더해 ‘크메르 루주(붉은 크
야마토게임무료다운받기 메르)’라고 불렸다.
폴 포트는 은둔형 통치자였다. 본명은 살롯 사인데, 한 동안 폴 포트와 동일 인물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크메르 루주 집권 시기인 1976년 기사는 공산당 서기장 살롯 사가 실제 권력자라고 전하면서 총리 폴 포트와는 다른 인물로 보도했다.
온라인골드몽1979년 1월 9일자 3면.
“캄보디아 정부는 명목상으로만 통치하고 있으며 실제 권력은 공산당 서기장 살로트 사르(살롯 사)가 이끄는 소수 집단의 수중에 들어 있다. (…) 헬리콥터를 몰고 프놈펜을 탈출한 (크메르 루주 조종사) 쿠온은 캄보디아 국가 원수인 키우 삼판과 수상 폴 포트 등은 ‘중요한’ 사람들이지만 최고위 지도층에는 들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올해 50세쯤 된 실권자 사르는 삼판과 같이 프랑스에 유학했던 지식인으로서 전쟁 중의 활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크메르 루주 내의 민족주의 세력을 숙청하고 크메르 루주의 반정부 운동을 고도로 단련시키는 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1976년 5월 7일 자 2면)
폴 포트(Pol Pot)는 ‘정치적 잠재력’이란 뜻의 영어 ‘폴리티컬 포텐셜(Political Potential)’ 또는 프랑스어 ‘폴리티크 포탕시엘(Politique Potentielle)’ 앞글자를 딴 이름으로 1975년 집권 때부터 사용했다. 1979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수도 프놈펜이 함락돼 총리 자리에서 쫓겨날 때에서야 폴 포트와 살롯 사는 동일 인물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1991년 11월 29일자 4면.
“20세기 들어 가장 과격한 급진적 사회 개혁 실험을 단행하면서 수백만의 인명(人命)을 잔혹하게 앗아가는 이 혁명가의 실상이나 그 동기 등은 거의 풀지 못하는 형편이다. 다만 폴 포트 자신이 던져준 일부 실마리는 그가 사실은 노련한 혁명가인 살로드 사르(살롯 사)와 동일 인물이라는 인도차이나 분석가들의 확신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신비의 인물 폴 포트에 관한 첫 실마리는 지난해 10월 폴 포트의 북경 공식 방문 시 북괴 평양방송이 폴 포트의 짧은 프로필을 소개했으며, 캄보디아인으로서는 다소 뚱뚱하며 짙은 검은 머리에 약간 희끗희끗한 폴 포트 사진을 북경 당국이 소개하면서부터 나왔다. 북경 당국이 공개한 폴 포트 사진은 살로드 사르의 앞서 사진과 의심할 여지가 없이 닮은 점이 많았고, 평양방송의 프로필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살로드 사르의 생애와 사실상 같은 내용이었다.”(1979년 1월 9일 자 3면)
1997년 6월 19일자 9면.
폴 포트는 실권 후 크메르 루주를 이끌고 밀림 지대로 은신해 게릴라전을 이어갔다. 1997년 7월 크메르 루주 중 그를 반대하는 세력에 체포돼 인민재판인 ‘정글 재판’을 받았다. 이때 18년 만에 얼굴이 새로 공개됐다. 백발에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다.
“캄보디아의 학살자 폴 포트가 크메르 루주의 옛 부하들에 의해 ‘종신형’을 언도받는 공개 재판 장면이 한 서방 기자에 의해 촬영, 공개됐다. (…) 이 비디오는 홍콩의 시사 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미국인 기자 네이트 테이어(37)씨가 지난 25일 캄보디아 북부 안롱 벵에서 직접 촬영한 것이다. (…) 재판정의 폴 포트는 백발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주변인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의자에 앉았으며, 재판이 끝난 뒤에도 군인 2명의 부축을 받아 어디론가 옮겨졌다. (…)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현장에서 이 모습을 촬영한 테이어 기자는 “폴 포트가 심각한 질병을 앓는 것처럼 보였으며 재판 도중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말했다.”(1997년 7월 30일 자 9면)
1997년 7월 30일자 9면.
‘정글 재판’ 8개월여 후인 1998년 4월 15일 가택연금 중 사망했다.
1998년 4월 17일자 1면.
“‘캄보디아의 학살자’ ‘킬링필드의 연출자’ 폴 포트가 마침내 죽었다. 시신은 연금돼 있던 캄보디아 북부 국경지대 정글 속 오두막에 누워 있었고,16일 일부 서방 기자에게 공개됐다. 학살 만행에도 불구73세 장수를 누린 그의 시신에 외상은 없었으며 곁에는 부인과 딸이 오열하고 있었다. (…) 폴 포트의 죽음은 캄보디아의 20여 년 피투성이 내전의 종말을 앞당길 것으로 보인다. 크메르 루주의 정신적 버팀목이 쓰러짐으로써 18년째 버텨온 ‘사회주의 혁명 게릴라’의 해체가 가속화될 것이기 때문이다.”(1998년 4월 17일 자 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