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항위안소에 억류되어 고생했던 조선 여인 박영심 할머니(임신한 여인)를 주인공으로 만든 위안부 청동 조각상. 건물 벽체에는 위안부들이 흘린 눈물방울이 부착되어 있다.
1937년 12월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들이 운영했던 위안소를 중국이 전시관으로 만들어 놨다. 부지 면적이 6,700㎡로 위안소 관련 시설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이다. 2003년까지 건물이 주택으로 사용되다가, 도시계획으로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보존 운동이 전개되어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 후 복원 사업을 통해 2015년 12월 1일 '이제항(리지샹)위안소 구지진열관
바다이야기#릴게임 '으로 개관했다. 조선인 위안부 관련 전시관도 있는데, 과거 이곳에서 위안부 생활을 겪었던 박영심 할머니가 2003년 11월 21일 전시관에 와서 직접 당시 실상을 증언하기도 했다.
위안부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이 식민지나 점령지 여성들을 모집해서 운영했던 성노예 제도다. 일본정부가 직접 관여했거나 민간에 의뢰했던 전쟁범죄다. 피해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여성들의 국적은 한국, 대만, 중국, 일본, 동남아, 네덜란드 등 다양했다.
위안소는 중국, 홍콩,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태평양제도 등 일본군이 점령했던 대부분 지역에 개설해서 운영됐다.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많은 위안소를 설치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전쟁범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위
오션파라다이스다운로드 안부 관련 자료 대부분을 없애버렸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근래에 들어와 중국과 동남아에 설치되었던 위안소의 실체가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특히 리지샹 위안소는 1937년 12월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본래 국민당 장군의 고급 주택을 개조해서 설치했는데, 옛 모습이 거의 변형 없이 남아있어서 원래 있던 위안소 원형 모습에 최대한 근접하
10원야마토게임 게 복원할 수 있었다.
일본이 난징 각처에 위안소를 설치하게 된 배경은 당시 중지나(中支那)방면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가 부녀자 강간이 지속되어 군기가 무너지고, 성병이 만연되어 전투력이 저하되는 걸 우려했다. 그는 위안소 설치를 상부에 건의했고, 위안소의 설치 건은 바로 승인이 났다. 그 뒤 종전까지 난징 일대에 40여 곳의 위안소를 일
릴게임사이트 본군은 개설해서 운영했다. 이는 위안소가 설치됐던 단일 도시로써는 최대 규모였다. 난징을 거쳐 갔던 일본군 병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제항위안소는 일본이 열었던 위안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이제항 2호는 '동운(東雲)위안소'로 불렀고, 뒤이어 개조한 18호는 '고향루(故?樓)위안소'라고 불렀다.
동운위안소는 2층 건물로, 1층과 2층에 각각 14개의 방이 있었다. 여기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상당히 많았다. 1942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일본 제15사단 군의부가 난징에서 일하는 위안부를 조사한 위생부로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 있었던 조선 여인은 214명이었다. 그중에는 2006년에 돌아가신 북한의 박영심 할머니와 역영란, 김순덕 할머니도 있었다.
박영심 할머니가 있던 19번 방.
박영심 할머니는 1939년 19살에 일본 순사에게 끌려서 평양을 거쳐 난징에 왔다. 약 3년 동안 이곳 이제항위안소에서 20명의 조선인 여성과 함께 있었다. 그녀가 생전에 밝힌 위안소의 실상은 참혹했다.
하루에 일본군을 30명 정도 상대했다. 만약 아프기라도 해서 저항을 하면 다락방으로 끌려가 발가벗겨진 채 매를 맞았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서 도망가고 싶었으나 감시가 혹독했다.
'만삭의 위안부'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쑹산에서 미군에 의해 구출 당시 스틸 사진. 맨 오른쪽 임산부가 박영심 할머니이다. 아이는 이후 사산했다.
하지만 더 끔찍한 지옥이 그에게 엄습했다. 박영심은 미얀마로 끌려갔고 중국과 미얀마의 전선인 윈난(雲南)성 쑹산(松山)에 보내졌다. 생전에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놈들이 술 먹고 달려들 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1944년 9월 중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 수비대가 전멸하면서 박영심은 포로로 잡혔다. 쑹산에 함께 있던 전체 위안부 중 4명만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병에 걸려 죽거나 폭격에 맞아 죽었다. 당시 박영심은 만삭이었는데, 포로수용소에서 보내져서 생활하다가 1946년 2월에야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갔다.
역영란 할머니는 19살이었던 1941년에 5명의 조선 여성과 함께 난징에 왔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6명이 낮에는 100명의 군관 의복을 빨아야 했고 낮에는 병사들을 받았다. 24시간 내내 2명의 병사가 그들을 감시했기에, 도망을 가는 건 꿈도 못 꾸었다. 1년여 뒤 6명은 각기 다른 부대를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만삭의 위안부'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쑹산에서 미군에 의해 구출 당시 스틸 사진. 맨 오른쪽 임산부가 박영심 할머니이다. 아이는 이후 사산했다.
역영란은 중국 대륙 곳곳을 전전해야 했다. 가본 곳이 하도 많아서 정확히 어디 어디를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생식기능을 잃어서, 종전 이후 귀국을 포기하고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서 거주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에 역영란은 혼자 살면서 중국인 전쟁고아를 양자로 거두어 키웠다. 국적은 중국으로 바꾸지 않고 북한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자, 역영란은 중국 정부에 북한으로 되어 있던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어 고향에 갈 수 있게 해줄 것을 탄원했다. 그녀는 수년 동안의 노력 끝에 귀국해서 고향인 전라남도에 살고 있었던 가족, 친척과 만났다.
생식기능을 잃어 홀로 살면서 양자를 키운 위안부 출신으로는 중국인 레이구이잉(雷桂英) 할머니도 있었다. 레이구이잉은 14살에 리지샹위안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1년 뒤에 강제로 위안부가 된 케이스였다. 그 과정에서 반항을 하다가 여러 차례 폭행을 당해서, 평생토록 온몸 곳곳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야만 했다.
비록 레이구이잉은 1년여 만에 한 중국인의 도움으로 위안소를 탈출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했다. 또한 고향에 소문이 퍼질 것을 두려워해서 산속에서 숨어 살다시피 했다. 2006년 양자의 권유로 위안부로 겪었던 일을 폭로했다. 하지만 1년 뒤 노환으로 고달팠던 생을 마감했다.
장용준 역사저술가·전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