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정부는 1945년 9월 26일부터 한간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전국 도처에 이런 광경이 흔했다.?
1945년 7월 26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 집결한 미·영·중 수뇌가 일본의 조건 없는 투항을 촉구했다. 8월 10일 새벽, 일본 천황이 포츠담선언 접수를 결정하자 내각도 임시회의를 열어 통과시켰다. 외무성이 스위스와 스웨덴 주재 대사에게 전문을 보냈다. "주재국 정부에 일본의 결정을 미·영·중 정부에 전달해 달라고 청해라."
일본의 중국 파견군 총사령부는 단파수신기를 통해 포츠담선언 승인 정보를 확인하고 의아했다. 패배를 인정
야마토게임 하지 않았다.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가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점령지역 주민들에게 소련의 대일선전(對日宣戰)과 일본의 투항소식 전파를 엄격히 단속해라." 12일, 참모를 극비리에 도쿄로 파견해 '작전 계속' 승인을 정부에 요청했다. 당일 '난징(南京)정부' 상하이 시장 겸 보안사령관 저우푸하이(周佛海)가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포고문을 발표했다.
바다이야기룰 "소련과 일본이 전쟁에 돌입했다. 시 정부는 기존 방침대로 맹방 일본과 협력할 것이다. 불초(不肖)한 도배들의 요언(謠言)산포, 질서파괴, 치안문란 행위를 엄히 응징한다." 해질 무렵 충칭의 국민당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 국장 다이리(戴笠)가 저우에게 전문을 통해 명령했다. "군사위원회 상하이 총대(總隊)를 지휘해 치안 안정에 만전을 기해라. 난징에
알라딘릴게임 가서 천궁보(陳公博)와 사후 대책을 논의해라." 다이리의 뜻은 장제스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중국은 입소문이 빠른 나라다. 웅크리고 있던 상하이 시민들이 거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폭죽이 터지고 영화 보던 관람객들도 자리를 박찼다. 상가는 물론, 사창가도 문을 닫고 폭죽 소리에 열광했다. 중공 근거지 옌안(延安)도 마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찬가지였다. 새벽 닭이 울어도 사자춤과 꽹과리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 ? ?
1941년 가을 도쿄 메이지신궁(明治神宮)을 참배한 왕징웨이. 오른쪽 첫째가 저우푸하이.
8월 14일 오후 8시 전
릴게임예시 시 수도 충칭(重慶), 연합국 중국 전구(戰區) 사령관을 겸하던 국민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蔣介石)의 쇳소리가 방송을 탔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오늘 우리의 위대한 항일전쟁이 승리했다." 이튿날 국민정부 외교부가 성명을 냈다. "일본 정부가 무조건 투항했다."
8월 18일, 왕징웨이의 후임인 거간(巨奸) 천궁보와 저우푸하이가 난징에서 머리를 맞댔다. 충칭에 있는 장제스에게 전문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난징의 민심 안정을 위해 속히 군대를 파견해 주기 바란다. 난징과 상하이를 중공의 군대가 접수할까 우려된다." 자신들이 지휘하던 군대를 위군(僞軍)이라 칭하며 납작 엎드렸다. "현재 상하이 교외에 주둔한 중공의 신사군(新四軍) 1만2,000 명이 도처에서 위군과 작은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저장성(浙江省) 동쪽에 있던 신사군 1만여 명은 이미 바다 건너 푸둥(浦東)까지 진입해 위군과 6일간 격전을 벌였다. 신속한 군 파견을 간청한다."
19일, 천궁보가 난징에서 충칭을 향해 아부성 발언을 했다. "나는 여전히 국민당원이다. 당에 대한 충성은 하루도 변한 적이 없다. 당은 분리될 수 없고 국가는 통일돼야 한다. 위군은 충칭 정부에 편입되기를 고대한다." 저우푸하이도 상하이에서 비슷한 성명을 발표했다. 장제스는 천궁보에게 냉담했다. 저우에게만 다이리를 통해 이런저런 지시를 전달했다.
천궁보는 충칭과의 합작은 환상이라고 직감했다. 항복 문서 서명 예비회담 하러 즈장(芷江)에 가는 일본군 참모장에게 부탁했다. 8월 23일 즈장에서 돌아온 참모장이 천에게 입을 열었다. "충칭 측에 일본과 합작했던 난징정부 요인에게 관대한 처리를 부탁했다. 난색 표하며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정말 미안하다." 천은 실망이 컸다. 일본 망명을 요청했다. 참모장의 보고를 받은 사령관 오카무라가 천궁보의 망명 자금 1,800만 엔을 마련했다.
출근하는 난징정부 행정원장 천궁보.
8월 25일 충칭의 군사위원회가 난징에 진입, 지휘부를 차렸다. 같은 날 새벽 천궁보 부부와 천의 비서 겸 정부(情婦) 외에 4명의 수행원을 태운 일본군 MC 수송기가 난징 명(明)고궁 비행장을 이륙했다. 일본으로 향하던 중 연필을 꺼냈다. 장제스에게 보낼, 법정에서 최후진술 하는 것과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썼다. "중공 창당에 참여한 것은 씻지 못할 실책이다. 왕징웨이 선생과 함께 한 것은 행운이었다. 1932년, 위원장과 왕 선생의 합작은 즐거운 시절이었다. 왕 선생이 추진한 일본과의 합작을 막지 못한 내 죄가 크다. 국가의 통일과 국민당의 단결을 기원한다. 전쟁기간 세를 확장한 중공은 통일의 큰 장애물이다. 유의하기 바란다…."
돗토리(鳥取)현 서부 요나고(米子)에 도착한 천궁보 일행은 9월 1일 교토(京都)의 여관에 짐을 풀었다. 일본 정부는 천궁보의 안전에 신경을 썼다. 여관 예약도 일본 이름으로 하고 천이 자살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8월 28일 미국 해병대의 요코스카(橫須賀) 상륙을 시발로 수십만의 미군이 일본 전역에 넘쳐났다. 천 일행은 고급 여관을 뒤로하고 교외의 금각사(金閣寺)로 거처를 옮겼다.
9월 9일, 국민정부 육군 총사령관 허잉친(何應欽)이 오카무라 야스지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8월 29일 일본 도메이(同盟)통신이 난징 괴뢰정부 대리주석 천궁보의 자살 소식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8월 25일 새벽 일본이 제공한 비행기로 요나고에 있다는 정보를 확인했다. 천 일행은 중화민국을 반역한 국사범이다. 귀관 책임하에 난징의 총사령부로 이송하기 바란다." 일본 정부가 "일본에 연금 중"이라는 이유로 인도를 거부했다. 9월 20일 재차 요구하자 일본 정부도 어쩔 수 없이 수락하고 천에게 통보했다.
9월 30일 중국정부가 파견한 C-47이 요나고에 도착했다. 10월 1일, 요나고로 가기 위해 교토를 떠나는 천궁보를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가 배웅했다. 죽음을 앞둔 매국거간(賣國巨奸)과 총리대신을 세번 역임한 전범의 작별은 처절했다. 서로 부둥켜안고 대성통곡했다.
수갑차고 송환된 천궁보는 이듬해 4월 5일 법정에 섰다. 8시간 동안 궤변과 요설로 일관하며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 4월 12일 오후 사형선고를 받고 6월 3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저우푸하이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돼 복역 중 사망했다. 고노에는 1945년 12월 16일 자택에서 제 손으로 삶을 마감했다.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