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파도처럼 뒤섞이는 순간에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언제든 자연스럽게 뒤섞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만약 그렇지 못한 두 사람이 마주 앉는다면 침묵은 길게 이어진다. 하지만 그 침묵이 두 사람 모두 원했던 것이고, 누군가 제안한 것이라면 이 또한 하나의 대화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말과 말 사이의 빈 공간으로 말을 건네는 방법도 있다. 그 순간엔 이 또한 하나의 언어가 된다. 바로 공백의 언어다.
빔 벤더스의 영화 <파리, 텍사스>와 <퍼펙트 데이즈>, 두 영화는 약 40년의 시간을
바다이야기#릴게임 사이에 두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한 곳에서 뻗어 나온 두 갈래의 가지와 같다. 거의 말을 하지 않는 두 주인공 트래비스(해리 딘 스탠튼)와 히라야마(야쿠쇼 코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말을 하는 방식,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에서도 말하지 않은 것으로, 또 보여주지 않은 곳으로 관객을 끌어당겨 이야기를 전하는 문법이 공통으로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바다이야기게임 <파리, 텍사스>를 처음 보게 된 건 빔 벤더스라는 감독을 알게 된 후 그의 모든 필모그래피를 훑으면서였다. 그 후로도 여러 번 보았지만, 마지막으로 다시 보게 된 건 <퍼펙트 데이즈>를 극장에서 보고 난 이후였다. 이날 극장을 빠져나오는 엘리베이터에서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고 영화가 하나도 재미없다’라고 말하는 남자를 만났다.
릴게임오션파라다이스 이 말을 듣고 나니 이 ‘재미’라는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다.
요즈음 말하는 ‘재미’는 쉬운 것이다. 받아들이기 쉽고, 소화하기 쉬운 것, 내가 아무런 의식적 힘을 사용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것.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이런 것뿐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바다이야기게임2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쇼트가 무엇인지, 몽타주 시퀀스나 미장센이 무엇인지 알아야 제대로 볼 수 있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런 관점이 영화가 주는 즐거움을 쉬운 것으로 단순화하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좋은 영화는 진심으로 느끼려 하는 만큼 느낄 수 있는 영화다. 다시 말해
바다이야기무료 관객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의식과 상상력을 활용한다면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 감응을 느낄 수 있는 영화가 좋은 영화다. 논리적 추론과 상상력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8살 이상이 되면 우리는 닫힌 문 뒤에 존재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만약 그 문이 이곳저곳 깊게 긁혀 있는 철문이고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다면 모두가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그 문이 아름다우며 기분 좋은 음악이 들려온다면 그 안에 즐거운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진정으로 좋은 영화란 누구나 어린 시절부터 발달시켜 온 상상력과 의식의 관성을 활용하게 하는, 그래서 모든 걸 말하지 않아도 각자가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어떤 공감의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이 공백의 언어를 활용할 줄 아는 영화다. 이야기를 감상하며 제대로 느끼기 위해 무언가를 억지로 배워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이미 이야기를 읽고 상상하고 또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을 활용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받아들이기 쉬운 ‘재미’보다도 크고, 알아야만 보이는 ‘주제’보다 깊다.
이야기가 지닌 힘에 올라탄 의식이 가는 곳
이야기가 지닌 힘에 올라탄 의식은 생각보다 멀리 간다. 이야기는 관객을 A에서 B까지 끌고 가되 이 힘의 관성에 의해 C까지 뻗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관객은 그 힘에 동참하여 아직 진행되지 않은 이야기의 지점 C까지 의식을 뻗을 수 있다.
<파리, 텍사스>에서는 이야기 초반에 이런 말하기가 활용된다. 왈트(딘 스톡웰)가 트래비스를 데리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서 앤(오로르 클레망)과 대화하는 장면, 앤이 “헌터에게는 뭐라고 해요?”라고 묻자 왈트가 답한다. “진실을 말해야지.”
두 사람은 헌터가 트래비스의 아들이며 몇 년간 실종되어 죽은 줄만 알았던 트래비스 대신 키웠다고 말하지 않지만, 이 장면에서 관객은 영화가 말하지 않은 지점으로 자신의 의식을 밀어 넣음으로써 트래비스와 헌터의 관계를 추론하고 자신만의 이야기 선을 그려나갈 수 있다.
영화의 절정에서 거울 유리를 사이에 두고 단절되어 있던 트래비스와 제인은 반영에 의해 하나로 합쳐진다. 이 시점에선 “난 이 두 사람을 알았소”로 시작되는 트래비스의 독백으로 인해 그와 제인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관객은 모두 알게 된다. 관객이 알 수 없는 부분은 두 사람의 속마음이다. 하지만 단절된 두 사람을 시각적으로 한데 모음으로써 관객은 이 두 사람이 공감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헌터와 제인을 만나게 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트래비스를 통해 그가 끝끝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제인이 ‘난 이제 당신을 용서할게요’ 혹은 트래비스가 ‘난 절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하지 않지만 알 수 있다. 모두 관객이 말하지 않은 침묵의 공간으로 의식을 밀어 넣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 영화가 주는 즐거움이다.
더 진화한 공백의 언어, <퍼펙트 데이즈>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는 트래비스와 닮은 면이 많지만, 삶에 대한 태도에서만큼은 그 결을 달리한다. 트래비스가 결말에 이르러 미주알고주알 자신의 과거를 읊는 것과 달리 히라야마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일말의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나마 유일한 단서가 여동생이 아버지를 좀 찾아가 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또 트래비스가 사막과 철도 위를 위태롭게 걸으며 자신의 과오에 대한 자기 처벌적 욕구를 드러내는 것과 달리, 히라야마가 화장실을 청소하는 행위는 자기 처벌적 욕구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한 실존적 태도에 가깝다.
그는 하루의 결정권을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의미와 기쁨을 찾는 것으로 그는 타인에 대한 의존성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독립적인 인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일본 영화 특유의 소소하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편안한 정서를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힐링 영화들의 수동적 인물들과 달리, 히라야마는 우리의 삶을 이루는 가장 기본 단위인 하루를 자신이 구축한 삶의 방식 안에서 지켜내는 능동적 인물로 보아야 한다.
그는 왜 저렇게 사는 걸까?<퍼펙트 데이즈>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까지도 A에서 B 지점까지만 관객을 끌고 간다. <파리, 텍사스>와 달리 C의 지점이 철저하게 생략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보다 보면 히라야마의 삶과 과거에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보는 사람마다 다른 결론을 내게 될 것이다.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편안한 정서가 아니라, 바로 이 의문이 일으키는 어느 정도 불편한 그 감정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그림자가 겹쳐지면 더 진해질까요?’ 도시의 그림자 영역에서 살아가는 히라야마와 역시나 그림자를 머금은 중년의 남자가 벌이는 잠시 동안의 희극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림자는 겹쳐진다고 해서 더 진해지지 않는다. 우리 삶의 그림자도 중첩이 된다고 더 진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자는 너무나도 손쉽게 마룻바닥 틈으로 숨어드는 작은 벌레들처럼 소멸하곤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빛에 집중한다. 언제나 빛을 좇으라 말하지만 그 빛은 그림자와의 대비에서 만들어진다. 히라야마가 스스로의 힘으로 하루하루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삶의 그림자 측면이라고 할 만한 부분을 수용하는 능력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빛은 오로지 빛만 존재하는 곳에서는 빛이 될 수 없다. 그 빛을 조각내고 산란시키고 ‘코모레비’로 만드는 것도 그 빛과 대비되는 잎사귀들이 머금은 그림자의 영역들이다. 아주 단순한 사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머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마치 영화처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어쩌면 완벽한 하루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신만의 의식의 렌즈를 만들어내는 가장 첫 번째 단계가 아닐까?
이 모든 것은 영화가 말하지 않은 비워진 공간으로 관객이 의식을 밀어 넣어 스스로 히라야마의 삶 전체의 서사를 상상했을 때 느낄 수 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화장실을 청소하는 소박한 삶에 만족하고 있는 히라야마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힐링 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빔 벤더스가 <파리, 텍사스>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더욱더 발전시킨 이야기다. 그래서 트래비스와 히라야마 두 사람 모두 아픈 과거를 숨기고 경계 바깥으로 밀려나간, 일반적 사회의 트랙에서 벗어난 인물이지만 두 사람의 대처가 다른 것은 40년의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들며 다듬어 온 빔 벤더스의 언어 때문이 아닐까?
“영상만 부각시킨 영화는 찍는 사람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반면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히 커뮤니케이션이다.”[1] -빔 벤더스 인터뷰 中
언제부턴가 극장에 가면 그곳은 텅 비어있다. 많은 사람이 모여 함께 보는 것만을 영화라고 정의 내린다면 그 영화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흐르는 이미지로 말하는 것, 이야기하는 것이 영화라고 정의 내린다면 그 영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책은 오래전부터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 개인의 공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책을 고르고 펼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덮을 수 있었다. 오로지 선택받기 위해 자극적으로 쓰인 책도 많지만, 그 사이에서 100년, 200년의 시간을 넘어 계속해서 선택받고 펼쳐지는 책들도 있다.
영화는 쾌락을 떠먹여 주는 시각적 롤러코스터도 아니고 아는 사람들만 즐기는 움직이는 미술관이 아니다. 영화가 더 오랜 생명력을 지니려면 언제든 다시 그 책장을 펼치게 만드는 힘을 지닌 고전들처럼 관객을 침묵의 공간으로 초대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연의 힘을 자극하여 말로도 전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보여줄 수 없는, 이미지 이상의 이미지, 오로지 영화만이 전할 수 있는 그것을 전하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영화의 책장은 그것이 선택받는 공간이 어느 곳이든 간에 계속해서 펼쳐질 것이다.
박정민 칼럼니스트
<참고문헌>[1] 로랑 티라르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 조동섭 옮김, 나비장책,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