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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의 한겨울은 비행기가 다니기 어려운 시기다.
그러나 내가 첫 월동을 했던 10년 전에는 혹독한 겨울에도 남미 국가의 군용기가 간혹 킹조지섬에 들어오곤 했다.
비행 일정이 잡히면 주변 기지들은 한 달 전부터 칠레 푼타아레나스를 통해 부족한 식재료를 구입했고, 비행기가 도착하는 날이면 우리는 거친 바다를 건너 그 귀한 보급품을 실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10년이 지난 지금, 3월부터 10월까지는 이곳으로 비행기가 아예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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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히 이곳에 있는 모든 기지는 이 기간 동안 중간 보급이 불가능하다.
서울에서 17,240km 떨어진 세종기지는 본국과 가장 멀리 떨어진 기지 가운데 하나다.
식재료는 매년 8월 무렵 연구소가 있는 인천에서 구매해 9월 초 한국을 떠나는 배에 실리고, 칠레 최남단 도시 푼타아레나스에서 다시 남극행 선박으다빈치 릴게임
로 옮겨진다.
이렇게 긴 여정을 거쳐야 매년 12월에서 1월 사이 세종기지 부두에 보급품이 도착한다.
그래서 기지에 보관 중인 채소와 과일 같은 신선식품은 물론, 라면과 음료, 간식류 같은 공산품도 대부분 8월이 지나면 유통기한을 넘기기 일쑤다.
그러면 기지에 남는 것은 쌀 같은 건조식품과 냉동식품뿐코스피지수
이다.
▲신선식품 보관 냉장고-연말까지 18명의 대원들이 나눠먹어야 한다
과거에는 간헐적으로라도 신선한 식재료를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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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흔한 과일 한 조각, 계란후라이도 몇 달째 맛볼 수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7월부터는 ‘블리자드’라 불리는 눈보라가 매일같이 몰아쳐 야외 활동이 급격히 줄었다.
인터넷 속도도 여름철보다 몇 배나 느려져 가족과 영상통화는 시도조차 어려운 날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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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말이면 인터넷 전화마저 수신 상태가 좋지 않아 상대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힘든 날이 잦다.
단짝처럼 지내던 아들과의 통화도 알아듣기 어려운 날이 많아 오래전부터 문자 메시지로 이어지고 있다.
그 때문인지 이제는 오히려 아들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며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날이 조금씩 늘고 있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다른 대원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야외활동을 자주 할 수 있던 여름철에는 함께 모여 운동을 하고 트레킹을 다니며 활기찬 생활을 했지만, 이젠 각자 방이나 연구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모두가 함께 모이는 날은 점점 줄어들면서 기지 안에는 묘한 적막이 감돌고 있다.
기지를 책임지고 있는 대장(김원준)은 그럴수록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며 사기를 북돋우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고립된 남극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을 완전히 덮기에는 역부족이다.
회의 시간마다 전해지는 소식도 예산 문제로 인한 인터넷 속도 제한, 중간 보급의 어려움, 그리고 대원들이 아끼던 식재료가 하나둘 바닥을 드러낸다는 이야기뿐이다.
그러던 중 얼마 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칠레의 쇄빙선-이 배를 통해 소중한 채소와 과일을 보급받았다
킹조지섬의 칠레 기지로 배 한 척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배에 우리 기지 몫으로 500kg가량의 식재료를 실을 수 있다는 소식에 조리 대원(이희영)을 비롯한 대원들의 얼굴에는 모처럼 미소가 번졌다.
조리 대원과 기지 총무(황의현)는 긴급히 신선 식품 목록을 작성했고, 국내 연구소를 통해 칠레 기지 측에 전달됐다.
대원들의 선호를 최대한 반영해 선택한 식품이었다.
날씨 탓에 며칠 미뤄졌지만 마침내 배가 도착하는 날이 다가왔다.
기후 변화로 이곳은 이제 한겨울에도 바다가 완전히 얼어붙는 일은 드물지만, 대형 선박 크기의 빙산이 종종 떠다녀 겨울철 작은 배의 접근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서 어떤 배가 들어올지 궁금했는데, 칠레 기지 대원에게 확인해 보니 칠레 해군이 운용하는 쇄빙선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아라온호’라는 쇄빙선이 있다.
하지만 단 한 척뿐이라 10월에서 3월은 또 다른 남극기지인 장보고기지에서 남극 연구를 지원하고, 6월에서 9월은 북극 연구 임무에 투입된다.
이 때문에 계절이 반대인 남극의 겨울에는 세종기지에서 아라온호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도 쇄빙선이 한 척 더 있다면, 혹독한 겨울에도 다른 나라 기지처럼 지원을 받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칠레 쇄빙선이 맥스웰만 건너편 필데스 반도에 도착했다.
우리는 회의를 통해 보급품을 실어올 인원을 선발했다.
나를 포함해 해군 SSU에서 파견중인 해상안전 담당 황대하 대원, 중장비 담당 서준영 대원, 생물 연구원 우재호 대원, 고층대기 연구원 안승민 대원까지 다섯 명이 선발돼 이른 아침부터 고무보트를 준비해 거친 바다로 나섰다.
백파가 부서지는 물결을 뚫고 기지를 출발한 지 30여 분 만에 ‘알미란테 비엘(Almirante Viel)’이라는 이름의 칠레 쇄빙선에 도착했다.
칠레 해군 담당자와 총 19개의 상자에 담긴 보급품을 확인하고 서류에 서명한 뒤 상자를 고무보트에 실었다.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거세고 파도도 높았지만 대원들의 마음은 가벼웠다.
부두에서 굴착기를 이용해 육상으로 옮겨진 보급품은 곧바로 냉장고와 냉동고에 나뉘어 보관됐다.
▲몇 달만에 맛본 계란후라이-우리는 평범한 계란 하나에 감동을 느꼈다
그날 점심, 대원들은 두 달 만에 계란후라이와 오렌지를 맛보며 웃음을 되찾았다.
물론 18명의 대원이 12월까지 버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평범한 음식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깨닫게 해준 순간이었다.
군 생활 4년과 두 차례의 남극 월동을 경험한 내게 누군가 “무엇을 빼앗겼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드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이렇게 답할 것이다.
따뜻한 햇볕, 원하는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다.
남극 기지의 월동은 바로 그 세 가지가 제한된 채 1년간 이어진다.
화창한 햇살은 일주일에 한 번도 보기 어렵고, 조리 대원이 정성껏 차려주는 음식은 늘 맛있지만 원하는 메뉴를 선택할 수는 없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자유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피할 자유도 거의 없다.
햇볕을 오래 보지 못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오랫동안 접하지 못하다 보니 대원들도 점차 예민해진다.
사소한 일로 짜증을 내거나, 적지 않은 나이의 대원들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도 종종 나타난다.
▲남극의 블리자드-겨울엔 며칠씩 블리자드가 불곤 한다
세종기지를 운영하는 본래의 임무는 대기, 우주, 생물, 해양, 지질 등 기후변화와 관련된 극지 연구다.
이를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생산하고, 중장비와 통신 설비를 유지·관리하며, 다양한 분야의 대원들이 연구지원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러나 남극기지에는 겨울을 버텨내는 데 있어 연구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다.
혹독한 겨울이 끝날 때까지 남은 한 달 남짓한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월동대원 모두는 오늘도 묵묵히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글쓴이 :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 오영식 작가의 여행 내용은 블로그와(blog.naver.com/james8250) 유튜브(오씨튜브OCtube https://www.youtube.com/@octube2022) 등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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