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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8-14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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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전망 "월미산 쪽이 고향이에요. 조상들이 1800년대부터 거기 살았고, 남편과 시아버지 얘기 들어보면 배로 물고기 잡으면서 지냈다고 해요. 빈털터리로 쫓겨났으니 뭐 있나. 그래도 그 앞에서 모여 살면 다시 고향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정전 협정이 체결되고도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때였다. 판자촌에서 월미도로 릴게임놀이터 가는 둑길은 여전히 가로막혀 있었다. 쫓겨난 신세는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 일제강점기 인천 개항장에서 월미도를 조망한 사진엽서 일부. 창고 건물 옆 부분 빨간 원에 산비탈을 따라 늘어선 초가지붕들이 보인다. 원주민들이 첫 번째 강제 이주로 정착했던 곳이다. /사진제공=릴게임먹튀검증 방법 중구 ▲포성 울린 '운요호', 강요된 개항 달순씨 시댁 조상들이 터를 잡은 19세기부터 인천 앞바다에선 포성이 울렸다. 서울로 가는 뱃길에 위치한 작은 섬 월미도에도 역사의 물결이 소용돌이쳤다. 1875년 9월19일 월미도 앞에는 '운요호'라고 이름 붙은 군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릴게임 다운로드 월미도에 정박해 닻을 내렸던 운요호는 이틀 뒤 한강하구로 향했다. 강화도 초지진에 다다르자 포탄을 쏟아부었다. 다음날에는 영종진으로 뱃머리를 돌려 '상륙작전'을 벌였다. 일본군의 갑작스러운 침략에 민가는 불에 탔고, 조선군 35명이 전사했다. 운요호 포격전 책임을 조선에 뒤집어씌운 일본은 이듬해 '강화도조약' 체결을 강요증권방송사이트 했다. 1883년 월미도에서 건너다보이는 제물포, 인천은 개항이라는 운명을 맞았다. "지금 확실한 약조를 맺고 부지뿐 아니라 석탄고 주변 땅을 차입해 놓으면 나중에 우리 해군을 위해 굉장히 도움이 되고, 한편으로는 외국인이 그 땅을 빌려서 같은 목적으로 사용 못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지도를 같이 보내겠다." 1888년 인천항 일본 영사가 본국 외무차관에게 보냈다는 서신에는 월미도 석탄 창고가 등장한다. 한적했던 섬마을 월미도는 개항장과 가장 가까운 섬이었다. 석탄고는 그로부터 3년 뒤에 지어졌다. 창고 주인은 일본이었다.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석탄 창고는 제국 열강이 한반도에서 벌인 패권 다툼을 상징했다. 당시 증기선 연료는 석탄이었다. 일본에 이어 러시아도 1896년 월미도에 석탄 창고를 설치했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이 친러 노선을 걸었던 때다. 이영호 인하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근현대 월미도의 역사 경험'(2014)에서 "본국에서 항해 거리가 먼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 연안에 석탄고를 두는 일이 절실했다"며 "일본 해군 수송선은 월미도 석탄고에 끊임없이 석탄을 비축했다"고 썼다. 월미도에서 벌어진 석탄 경쟁은 결국 군사적 충돌을 낳았다. 1904년 2월 초 월미도 앞바다는 다시 포성으로 뒤흔들렸다. 러시아 순양함 '바리야크'가 침몰한 러일전쟁의 시작, 제물포해전이었다. ▲ 1947년 인천 항공 사진에서 월미도 지역을 확대했다. 빨간 원으로 표시된 지점이 일제에 의한 두 차례 강제 이주 끝에 원주민들이 인천상륙작전 때까지 살았던 마을이다. /자료=인천시 지도포털 ▲사라진 마을, 강제 이주의 시작 "월미도가 요충지였으니까. 이곳을 차지해야 강화, 마포로 차례로 들어갈 수 있었잖아요. 월미도 주민이 이렇게 핍박당한 것도 요충지에 살았기 때문이지." 한인덕(80)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장이 지난달 18일 월미도 지도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지도 위에서 마을 위치는 화살표를 따라 옮겨졌다. 외세가 몰려와 작은 섬을 놓고 경쟁하기 전부터 월미도에는 바닷가 마을이 있었다. 1879년 제작된 '화도진도'에서도 월미산 아래 민가들을 확인할 수 있다. 달순씨 시댁 조상들이 살던, 그리고 한 세기가 흘러 판자촌 사람들이 그리워하던 고향 마을이었다. 마을에는 이미 수십 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다. 1899년 뇌물이 오간 월미도 개간 허가서를 일본인이 사들여 소유권을 주장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일제가 발간한 '인천부사'(1933)에는 "월미도 러일 석탄고와 미국인 소유 석유 창고 및 조선인 주거 53호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공간의 땅"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월미도로 몰려왔던 그들이 벌인 전쟁은 한적했던 어촌 마을에도 먹구름을 드리웠다. 월미도는 러일전쟁 직후 '임자 없는 섬'으로 취급받았다. 일제 침탈도 가속화했다. 개항장을 마주보고 있던 섬, 월미도에선 내륙과 이어지는 교량이 건설됐다. 군용 화물과 석탄을 운반하는 철로였다. "월미도에 토지·분묘 등을 가진 가옥 80여호 조선인이 거주하는데, 일본 철도감부(철도 관리 기관)가 음력 4월11일 이내에 철거할 것과 기일을 지키지 않으면 강제로 축출할 것이라는 조치를 내리고 있다." 귀향대책위가 수집한 가장 오래된 시기 기록물인 1905년 5월9일자 대한제국 공문서는 강제 철거에 항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의 외무부 차관으로, 후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외부협판 윤치호(1866~1945)가 일본 공사에게 보낸 문서다. 군사기지가 만들어지면서 끝내 마을은 통째로 옮겨졌다. 개항장이 보이는 미국 스탠더드 석유회사 창고 옆이었다. 철거에 이은 강제 이주사는 그때부터 되풀이됐다. 고향집을 눈앞에 두고 떠나야 하는 수난사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월미도 주민 누구도 알지 못했다. ▲ 1950년 무렵 월미도 원주민 거주 위치도. /자료=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 ▲"120가구가 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월미도 주민들은 재차 강제 이주를 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일제는 마을이 옮겨졌던 월미산 비탈의 암석에 눈독을 들였다. 1942년 무렵, 첫 번째 강제 이주를 겪은 지 38년이 지났을 때였다. "거기가 돌산이었으니까 돌을 캐서 바다 메운다고 또 옮겨간 거예요. 일본이 마을을 이리저리 보내놓고는 자기네들 땅으로 만든 거지. 그러는 바람에 뺏긴 거고." 한 위원장은 지도에서 월미공원 전통정원 자리를 짚었다. 예전 마을에서 석유 창고를 기준으로 북쪽 방향 건너편이었다. 과거로 치면 둑길을 건너 월미도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지금의 월미바다열차 월미공원역 바로 앞이다. 다시 일군 삶의 터전에서 주민들은 해방을 맞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12월19일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했다.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재산이 남아 있었다. 미군정은 귀속재산 관리인과 임차인에게 우선적으로 불하받을 권리를 주는 '연고자 우선주의' 방식을 택했고, 이런 기조는 귀속재산처리법에도 적용됐다. 월미도 마을 역시 어수선했다.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 당시 생존자들은 "등기를 하려면 돈을 주고 땅을 사야 되니 형편 있는 사람들만 등기를 할 것인지 상의해 인천시청에 갔는데 공동으로 등기하라고 해서 마찰이 있었다", "시에서 한꺼번에 등기해야 된다고 했는데 벽이 붙어 있는 집의 측량, 돈 문제로 시일이 걸렸다"고 진술했다. 일제 침탈 여파는 등기 신청마저 복잡하게 만들었다. 1950년 6월25일까지도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2008) 보고서에서 당시 거주민 명단 및 거주 위치도, 인천 중구청에서 확보한 제적부, 그 외 거주 사실과 관계된 여러 증거자료 등을 검토한 결과를 바탕으로 "월미도에는 약 120가구 600여명이 살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전쟁의 물결은 다시 밀어닥쳤다. 인천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월미산에는 요새가 구축됐다. 그리고 그해 9월10일 아침이 밝아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이순민·이아진·변성원·정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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