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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품으로 봉건적 인습과 사상에서 벗어나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뜨게 되었다. 동생 시영은 과거시험 후 관료로 성장했으나 관직에 관심이 없던 선생은 죽마고우 이상설과 어울리면서 시국에 대해 걱정하며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4년 선생은 독립운동의 요람 ‘상동교회’에서 상동청년학원을 열고 학감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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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선생은 아나키스트로서 자신의 영예와 재산을 모두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 농협채용 천했다. [사진 이회영 기념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외부교섭국장인 동생 시영과 함께 조약철회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한다. 이듬해 선생의 집에서 한정사 이상설·이동녕 등이 모여 해외 항일운동 거점을 마련하기로 상의하고 중국 용정으로의 이주계획을 세웠다. 이후 이상설과 이동녕이 먼저 용정으로 가서 항일민족학교 서전서숙을 설립하는 등 해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07년 선생은 헤이그특사 사건에도 깊이 관여해 고종에게 특사 파견을 주청하고 이상설과 이준을 추천했으며 밀서와 신임장을 이상설에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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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4월 선생은 윤치호·안창호·이동녕·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결사단체 신민회를 결성했다. 신민회는 상동교회를 지도부로,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삼아 일본의 만행과 친일파의 죄상을 폭로했다. 신민회 활동에 일제의 압박이 강화되자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을 만나 독립군을 양성해 조국 광복의 길을 모색키로 한다. 1 홈플러스인터넷 909년 봄 신민회 간부 회의에서 만주로의 집단 망명과 독립운동기지 건설, 군관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선생과 이동녕 등이 먼저 현지에 가도록 했다. 이들은 초산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 횡도촌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만주로의 이주·정착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기에 선생은 스스로 앞장서 모든 가산을 정리하려 귀국했다. 6형제가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선생은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걸할 수는 없으니 온 가족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함께 나설 것을 제안했고 모든 형제들이 이를 쾌히 수락했다. 선생 일가는 가산과 전답을 급하게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 40만 냥을 마련했다. 지금의 쌀값으로 환산하면 600억원 이상, 토지 가격으로는 조 단위의 거금이다. 1910년 12월 일가 40여 명은 북풍한설이 기다리는 만주로 망명에 나서 신의주에서 얼어붙은 압록강을 썰매로 건너 다시 횡도촌을 경유해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은 대고산 자락의 넓은 평지로 선생과 이동녕 일행이 서간도 답사 때 무관학교 설립 장소로 보아두었던 장소다. 이회영 일가의 소식을 들은 이상룡·김대락·김동삼 등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삼원보 일대로 합류해왔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우당 이회영 기념관. [사진 김석동]







모여든 독립운동가들은 이듬해인 1911년 4월 대고산 아래에서 민족대회를 열고 동포자치기관 경학사를 출범 시키고 선생이 내무부장을 맡았다. 이어서 선생은 이동녕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선생은 베이징으로 가서 최고 실권자 위안스카이를 만나는 등 토지 마련을 위해 진력한 끝에 천혜의 군사요새지인 합니하 강가의 땅을 선생 일가의 자금으로 구입해 동포들의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신흥무관학교도 신축해 출범 시키게 된다. 만주의 혹한과 식량난, 마적 떼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항일무장투쟁의 전초기지가 마련된 것이다. 이회영은 경학사 조직과 신흥무관학교 건립을 주관했으나 직책은 항상 사양했다. 자리나 명예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인으로서의 성품 때문이다.

신흥무관학교에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계속되었고 1911년 말 첫 졸업생이 나온 이래 10년간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어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 등 무장독립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1913년 선생은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단신 밀입국해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1919년까지 6년간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활동했다. 1918년 선생은 고종황제의 베이징 망명 계획을 추진했으나 고종의 죽음으로 무산되자 이듬해 1919년 2월 베이징으로 다시 망명했다. 당시의 국내 활동은 비밀리에 추진되어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3·1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진행되자 동생 시영과 함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한 선생은 정부 형태의 임시정부 조직에 반대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연합할 수 있도록 조정·연결하는 독립운동 총본부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부 형태 조직이 되면 분규가 끊이지 않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임정은 출범 직후부터 갈등과 내분에 휩싸이게 된 바 있었다. 임정의 분규에 실망한 이동녕·이시영 등도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선생의 거처는 신채호·김창숙·김규식 등 명망 있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독립운동의 요람이자 산실이 되었다.

동생 시영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회영 선생의 흉상. [사진 김석동]







1922년 선생은 베이징과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진력했으나 세력 간 상호대립에 실망하게 되었다. 사상적 번민을 계속하던 선생은 공존공영의 이상사회를 지향하면서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받아들이고 중심 인물이 된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고 강제적 권위에 반대하며 권력 없는 사회, 지배 없는 자유주의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이념이다. 당시 아나키즘은 의열단 등 의열투쟁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고 선생은 의열단체인 다물단(多勿團)을 조직하기도 했다. 1924년 선생은 신채호·류자명 등과 함께 외교독립론과 실력양성론, 공산주의노선을 모두 비판하며 새로운 독립운동을 지도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게 된다. 이 연맹은 한인 단결과 무장독립투쟁을 지지하며 활동에 나섰으나 자금 문제로 한계를 맞게 된다.

망명 생활이 지속되면서 선생 일가는 베이징에서 극심한 가난을 겪게 되었고 텐진으로 이주했으나 나석주 의사의 의거에 관련되어 피신하는 등 생활은 더욱 곤궁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아나키즘 신념은 계속 되었고 그곳에서 김좌진 장군의 사촌인 젊은 혁명가 김종진을 만나 아나키스트로 인도하게 된다. 선생과 김종진은 김좌진이 아나키즘에 호의적인 입장으로 바뀌게 함으로써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이 한족총연합회로 통합항일전선을 이루도록 했다.
1930년 텐진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의 압박으로 만주로 활동 무대를 옮기기로 했으나 고령의 이회영은 아들과 함께 상하이로 향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만주를 탈출한 아나키스트들은 상하이로 몰려들었고 선생의 지원 하에 아나키스트 운동을 계속 했다. 선생은 중국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항일구국연맹’과 행동조직인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활동에 나섰다.
1932년 선생은 만주를 새로운 활동 무대로 삼기 위해 앞장서 만주행을 결심하고 상하이 황포강 부두에서 다롄으로 향했다. 다롄 도착 전 일경의 경비선에 체포된 선생은 다롄경찰서에서 취조 받던 중 혹독한 고문 끝에 그 해 11월 17일 6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유해는 일제에 의해 화장되었다.
선생은 영예와 재산을 모두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끝내는 순국에 이르렀다. 신민회,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주역을 맡았던 선생은 아나키스트로서 동아시아인들이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평화를 지키고 협력으로 자유연대와 공존공영을 이루어 나가려는 꿈을 꾸며 항일운동에 일생을 바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6형제 중 5명이 독립운동 중 순국했고 그의 아들들도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후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 시영이 조국에 돌아올 때 살아남은 일가가 20여 명 밖에 없었다 한다. 이종찬·이종걸 전 의원이 선생의 손자다.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허묘로 안장되었다. 서울 사직동에 이회영기념관이 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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