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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웹스터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양대 엘리트 권력기관인 FBI와 CIA 수장을 지낸 공직자다. 레드 스테이트(Red State) 출신 공화당 판사였지만 청렴성과 법에 근거한 다수의 인권 판결로 명망이 높던 그를 민주당 대통령인 지미 카터가 FBI 국장으로 임명했고, 이란-콘트라 게이트로 궁지에 몰렸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다시 그를 CIA 국장으로 발탁했다. 그를 지탱한 원칙은 당파에 치우치지 않는 법치와 민주주의였다. 그는 "FBI와 CIA 국장은 부당한 지시를 받으면 언제든 사임할 각오를 해야" 하는 자리라 여겼다. 1987년 의회 상원 정보위에서 선서 하는 웹스터. AP 연합뉴스


윌리엄 웹스터(William H. Webster)는 미국 양대 권력기관인 연방수사국(FBI)과 중앙정보부(CIA) 국장을 모두 지낸 유일한 공직자다. 평생 공화당원이었던 그는 1978년 지미 카터(민주) 대통령에 의해 FBI 국장으로 임명돼 에드가 후버 체제의 탁하고 음 침했던 조직을 혁신했고, 이란-콘트라 게이트로 백악관과 CIA가 궁지에 몰렸던 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을 맡아 걸프전과 소비에트 해체 등 정치·군사·외교 격랑 속에서 조직을 정상화하며 만 4년 3개월 간, 역대 5번째로 오래 조직을 이끌었다. 공직자로서 그가 견지한 원칙은 정치적 이해에 치우치지 않는 법치와 민주주의였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공직자의 전범”이라 평했던 그가 별세했다. 향년 101세.
만 48년(1924~72) 가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후버가 숨진 뒤 FBI는 내부적으로 동요했고 외부적으로 표류했다. 국장 권한대행(L. Patrick Gray III)이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연루돼 사임하는 등 파행하던 끝에 73년 취임한 2대 국장 클래런스 켈리(Clarence. M. Kelley)가 조직을 안정화하며 개혁의 기반을 다졌지만 후버의 수족들(hard-hats)들을 제어하며 체질까지 바꾸는 덴 역부족이었다. 켈리는 후버의 잔재(장기 재임) 하나를 청산하듯, 76년 의회가 법으로 보장(제한)한 10년 임기를 절반이나 남긴 채 조직 정년 규정(만 65세)을 존중해 78년 퇴임했다.77년 취임한 카터의 숙제 중 하나가 마땅한 후임을 찾는 거였다. FBI 개혁 즉 정치 편향과 불법 사찰 등 초법적 관행을 뿌리 뽑고 조직을 법의 테두리 안으로 이끄는 일, 그게 카터가 생각한 후임의 주요 임무였다.
법무부가 경력과 능력, 청렴성, 중립성 등을 따져 1년 넘게 고른 후보자 5명을 카터는 모두 퇴짜 놓았다. 급기야 초대 법무장관 그리핀 벨이 들이민 카드가 당시 연방고등법원 판사 웹스터였다. “500명이 넘는 주변인을 인터뷰했지만 아무런 흠집도 찾지 못했다”는 인물. 다만 그가 야당 사람이란 게 문제였다. 카터는 그를 3대 국장에 임명했고, 웹스터는 관례를 깨고 백악관이 아닌 워싱턴D.C FBI 본부에서 취임식을 열었다. “헌법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시민의 기대에 따라 조직을 이끌겠다”던 상원 인준 청문회의 다짐을 그 첫걸음으로 재천명한 그는 레이건 정부 말기인 87년 5월까지 만 9년 재임하며 적어도 알려진 바 그 약속을 지켰다.
86년 11월, 워터게이트 이래 최악의 정치 스캔들로 꼽히는 ‘이란-콘트라 사태’가 터졌다. 중앙정보부(CIA)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방부 등이 헤즈볼라에 억류된 미국인 인질 석방을 위해 이란 혁명수비대에 은밀히 무기를 팔고, 그 돈으로 니카라과 우익 콘트라 반군을 지원한 것. 특별검사 지휘하에 냉전기 미국 최강 권력기관들에 대한 FBI 수사가 시작됐다. 웹스터 휘하의 정예 요원 30여 명은 백악관 안보 보좌관 등을 심문하고, CIA와 NSC 본부를 압수수색하고, 삭제된 통화 기록과 이메일 시스템을 복원했다. 그 와중이던 87년 5월, 스캔들-음모의 핵심 인물로 지목돼던 CIA 국장 윌리엄 J. 케이시가 림프종으로 숨졌다.
레이건은 초당적 지지를 받던 “Mr. 클린(Clean)” 웹스터를 CIA 신임 국장으로 임명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레이건의 권력자들이 84년 해외 테러 용의자를 납치해 미국 법정에 세우는 방안을 논의할 당시 가장 강경하게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국내 법 집행기관인 FBI와 달리 CIA는 해외 정보 수집 및 비밀 첩보-공작 기관이자, 외교·안보 정책에도 깊이 관여된 대통령 직속기관이다. 대통령 지시로 특정 정보를 수집하거나 비밀 작전을 수행해야 할 때도 있고, 그 정보가 정치적 이해에 따라 왜곡될 여지도 많다. 웹스터는 인사 발표 직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CIA나 FBI 국장은 스스로 판단해 그릇된 지시를 받으면 언제든 사임할 각오를 해야 한다.”
CIA 내부 반발은 FBI 때보다 훨씬 거셌다. 그가 라이벌 기관의 리더인 데다 해외 첩보와 외교 분야에 사실상 문외한이어서였다. 웹스터는 신망받던 정보 분석가 리처드 커(Richard J.Kerr)를 부국장으로 발탁하고, 관록의 베테랑 첩보원 출신 대학 동기 딕 스톨츠(Dick Stolz)를 복직시켜 비밀작전부서 책임자로 배치했다. 둘의 리더십으로 조직을 추스른 그는 곧장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연루된 고위 간부 다수를 해고하는 등 강도 높은 인사조치를 단행했고, 의회 정보위에 대한 초당적 보고와 협력 시스템을 구축해 조직의 중립성-투명성을 제고했다. 그렇게 그는, 레이건-조지 H.W. 부시 정부와 더러 불화하면서 91년 8월까지 재임했다.그는 스스로를 “공직에 임하는 사적인 사람(private man in public life)”이라 규정했다. 선출직 정치인과 달리 소임을 완수하면 언제나 떠나야 하는 전문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겠다는, '시민'에 방점을 둔 철학이었다.



1978년 2월 FBI 국장 취임 선서 직후의 웹스터(오른쪽 두 번째). 그의 오른쪽이 지미 카터 대통령이고, 왼쪽이 워런 버거 연방대법원장이다. AP 연합뉴스.


윌리엄 웹스터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나 앰허스트(Amherst) 칼리지를 거쳐 49년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학부 시절 해군에 입대해 2차대전을 치렀고, 로스쿨 졸업 직후 한국전쟁으로 재소집돼 법무장교(중위)로 복무했다. 그는 군 물자를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한 병사가 심문 중 변호사 조력을 받지 못한 점을 문제 삼아 묵비권으로 군 당국에 맞서게 했다. 이후 미 연방군 전체에 적용되는 통일군사재판법(UCMJ)에 변호사 선임권 고지 의무가 추가됐다. 당시는 전시였다.
그는 60년 아이젠하워(공화) 정부에 의해 미주리주 동부지검장으로 임명됐다가 이듬해 J.F.케네디(민주) 정부가 출범하자 관례에 따라 사임했다. 70년 리처드 닉슨(공화) 정부 때 미주리주 동부 연방지법 판사, 73년 제8순회법원 판사가 됐다. 판사 시절 그는 여러 소신 판결로 주목받았다. 미네소타대학이 학내 동성애자 단체 승인을 거부하면서 비롯된 소송에서 그는 그 단체의 손을 들어주었고, 노스다코타주 파고(Fargo) 경찰 당국의 여성 경관 차별 임금제를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70년대였고, 공화당 텃밭이었다.
후버 체제의 FBI는 시민권법(64년)과 연방고용평등규정까지 무시하며 여성 특수요원 채용을 거부했다. 여성요원은 후버 사후인 72년 7월에야 처음 채용됐다. 재임 기간 웹스터는 90명 남짓이던 여성 특수요원을 800여 명으로 늘렸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요원 역시 약 2배로 보강했다. 78년 최초의 흑인 현장 책임자(Thomas P. Norris)를 임명하기도 했다.
웹스터는 78~80년 대규모 정치권 부패 비밀수사인 ‘앱스캠(Abscam) 수사’를 지휘, 중동 사업가로 위장한 요원들에게 특혜를 약속하며 거액 뇌물을 받은 상하원 의원 7명을 뇌물수수 등 혐의로 기소했다.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여당(민주)이었다. 80년대 중반엔 일리노이주 쿡카운티 법조계의 오랜 공직 부패를 수사(Operation Greylord), 현직 판사 17명을 비롯해 90여 명의 검사와 변호사, 보안관, 경찰관, 주 의원 등을 무더기 기소했고, 5대 마피아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로 제노비스(Genovese) 패밀리 등 3대 조직 보스를 ‘폭력 및 부패 조직법(RICO법)' 위반 혐의 등으로 법정에 세웠다.
전임 켈리 국장이 설정한 FBI 3대 우선 과제-조직 범죄, 화이트칼라 범죄, 방첩-에 테러리즘을 추가, 대테러 프로그램을 강화한 것도 그였다. 82년 한 해 51건에 달하던 미 국내 테러 사건은 86, 87년 각각 4건과 7건으로 줄었고, 육군 특수부대를 본뜬 대테러 고강도 전술팀(현 인질구출팀, HRT)도 창설했다. 데이비드 핀처의 실화 기반 넷플릭스 드라마 ‘마인드 헌터(Mindhunter)’가 조명한 것처럼, FBI 범죄행동분석-프로파일링 부서가 정부 차원의 지원하에 공식 궤도에 오른 것도 그의 임기 중 이뤄진 일이었다.



1987년 5월 버지니아 랭리 CIA 본부에서 취임 선서하는 웹스터. 맨 왼쪽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고, 가운데 여성이 90년 재혼한 아내 린다다. wikimedia.commons


CIA 국장 출신인 조지 H.W. 부시는 법률가 출신인 웹스터를 대체로 불신하고 마뜩잖아 했다. 뉴욕타임스는 대통령이 전 세계 CIA 지부장들을 불러 직접 보고를 받곤 했다고 썼다. 냉전시대 중남미에서 자행된 CIA 공작 방식으로 파나마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축출하고자 했던 부시의 뜻은 웹스터 체제에선 불가능했다. 부시는 다수의 희생자를 낸 1989년 12월의 파나마 침공을 택했다. “(부시)대통령은 CIA보다 CNN을 통해 파나마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다는 말을 넌지시 흘리는 식으로 웹스터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물론 과오도 있었다. 웹스터 체제의 FBI 방첩망은 악명 높은 CIA 이중스파이 올드리치 에임스(Aldrich Ames)와 로버트 핸슨(Robert Hanssen)을 놓쳤다. 그의 CIA는 소비에트 해체-냉전 종식의 시점을 예측하지 못했다. 이른바 ‘정보실패(intelligence failure)’. 하지만 웹스터는 “정보실패란 전혀 몰랐던 어떤 일이 일어난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당시 CIA도 소비에트 체제가 위태롭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며 “그건 정보실패가 아니라 시점(the moment)을 예측하는 데 실패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뿐 아니라 그 누구도 시점을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걸프전 이후 CIA에 대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앞두고 “칼잡이(Mack the Knife) 역할은 내게 맞지 않는다”며 사임했다.
2002년 그가 공개회사회계감독위원회(PCAOB) 초대 위원장으로 선임되자 민주당이 반발했다. 엔론 회계부정 사태 직후 의회가 투자자 보호를 위해 신설한 그 단체의 장을 맡기에 그가 부적절하다는 거였다. 앞서 그는 회계부정 의혹을 받던 한 나스닥 상장사(U.S Technologies Inc) 감사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었다. 웹스터는 자신의 결격 사유를 사전에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알렸지만, 당시 위원장 하비 피트(Harvey Pitt)가 그 사실을 SEC 위원들에게 은폐한 채 표결-임명을 강행한 결과였다. 웹스터는 PCAOB 공식회의를 단 한 번도 주재하지 않고 3주 만에 사임했다.
15년 뒤 그는 또 한 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자메이카 국적의 한 사기꾼이 전화로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으니 세금과 수수료만 송금하라고 속여 돈을 갈취하던, 당시 기승을 부리던 고령층 대상 사기 사건의 피해자로서였다. 자신의 ‘먹잇감’이 FBI와 CIA 전 국장의 아내란 걸 몰랐던 범인은 살해 협박까지 일삼다 웹스터의 신고로 수사에 착수한 FBI에 의해 2019년 체포돼 71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자문위원회 위원장(2005~2020)이던 웹스터는 고령층 사기 사건 예방 공익 광고에 출연했다. 그는 대통령 자유메달을 비롯한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2019년 자신과 아내(맨 왼쪽)가 겪은 사기 사건을 FBI 수사로 해결한 직후 기자회견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설명하는 만 95세의 백악관 국가안보자문위원회 위원장 웹스터. AP 연합뉴스


그는 1950년 드루실라 레인(Drusilla Lane)과 결혼해 2녀 1남을 두고 84년 사별한 뒤 이벤트 기획-마케팅 전문가인 사업가 린다 클럭스턴 웹스터(Lynda Clugtston Webster)와 90년 재혼했다. 그와 레인은 ‘크리스천 사이언스교' 신자였다. 물질을 부정하며 질병 역시 영적인 결핍에서 비롯된다며 의학적 치료 대신 기도 등 영적인 치료를 중시하는 종교. 아내 레인도 항암치료를 거부하던 끝에 숨졌다. 웹스터는 자신의 신앙과 별개로 82년 ‘타이레놀 공포’ 즉 일리노이주 시카고 일대에서 청산가리가 주입된 타이레놀 캡슐을 먹고 7명이 숨지는 사태가 터지자 즉각 FBI 요원들을 투입, 제약사 등과 협력해 위기 상황에 성공적으로 대처했고 유사 테러 사건에 대한 FBI 대응 매뉴얼을 만들었다.
FBI는 1908년 법무부 산하 조사국(BOI)으로 출범한 이래 여러 법률과 대통령령 등으로 권한이 확장돼온 탓에 고유 권한과 역할 등을 규정한 단일 법이나 헌장(charter)이 없다. 지금도 법적 구속력 없는 법무부 가이드라인이나 대통령 지침 등에 언제든 휘둘릴 수 있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CIA는 더 취약해 두 권력기관은 늘 정치적 편파성 혹은 외압 시비에 휘둘리곤 한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이 해임된 일, 전 FBI 국장이던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의 대선 러시아 개입 스캔들 수사(2017~19)가 정치 공방 속에 파행한 게 대표적인 예다.
웹스터는 2017년 언론 인터뷰에서 “FBI 국장은 대통령의 친구가 아니라 법치의 수호자”라며 코미의 해임을 강도 높게 비판했고, 2018년 전직 CIA 국장 및 부국장 12명과 함께 공개 서한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의혹을 추궁했다. 뮬러 특검 수사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파괴적인 방해가 한창이던 2018년 7월 그는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썼다. “사법제도와 정보 기관에 대한 믿음이 당파적 싸움의 부수적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건 누가 이기든 미국의 패배를 의미한다.” 2020년 대선을 앞두고도 트럼프 진영의 법치와 법집행-정보기관의 정치 중립 훼손을 비판하는 국가 안보분야 공화당 인사 성명에 참여했고,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를 공개 지지했다.2018년 칼럼에서 그는 “내가 지닌 가장 자랑스러운 직함은 모든 미국인이 공유하는 ‘시민’이라는 타이틀”이라며 “지금 같은 시기에 시민에게는 의무가 있다”고 썼다. “법치로 하나 된 미국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의 난폭한 방해에 맞서) 제 의무를 다하고 있는 뮬러를 위해 헌신하고 발언하자”고 촉구했다. 그는 숨질 때까지 공화당원이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